‘핵전력 업그레이드’ 무한경쟁 불붙다
[동아일보 2007-02-26 04:13]
가공할 만한 핵 공격과 보복 위협으로 ‘공포의 균형’을 유지했던 냉전시대가 종언을 고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이 새로운 핵무기 개발과 성능 개선 작업에 여전히 힘을 쏟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노후 핵무기의 교체를 추진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도 이에 질세라 신형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이 같은 핵무기 보유국들의 전략무기 현대화는 한국에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당장 한반도 주변 강국들의 군사력 경쟁과 함께 한반도가 신 냉전의 한복판에 끼어들지도 모를 전략적 상황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 미국의 핵탄두 현대화 작업
탈냉전의 국제환경 속에서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핵 억지’라는 냉전시대의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 핵무기 유지 관리 책임을 맡은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NNSA)은 핵 억지 전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NNSA는 기존의 노후 핵탄두를 신형 핵탄두로 교체할 계획이다. 이른바 ‘신뢰할 만한 대체 핵탄두(RRW·Reliable Replacement Warhead) 프로그램’이다. 1970, 80년대에 만들어진 노후 핵탄두의 일부 부품을 갈아 수명을 20, 30년 연장하는 프로그램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새로운 핵탄두로 교체하겠다는 것이다.
NNSA는 RRW의 개발 및 배치를 2030년 이전으로 당기고 노후 핵탄두 600여 기를 1700∼2200기의 신형 핵탄두로 교체하는 ‘콤플렉스 2030’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지하 깊숙이 숨겨진 시설을 공격하기 위해 전술 핵무기인 벙커 버스터를 개발하겠다는 구상의 후속탄인 셈이다. 냉전시대를 마감하면서 과감한 핵무기 감축 조치를 취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행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둘러싼 논란도 거세다. 맨해튼 프로젝트 멤버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핵과학자의 독립된 자문위원회인 ‘제이슨(JASON)’은 지난해 말 NNSA의 추정과 달리 핵탄두 내 무기급 플루토늄의 수명이 90년에 이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굳이 RRW 프로그램을 추진해 핵 군비 경쟁을 벌여야 하느냐는 논란도 거세다.
미 의회조사국(CRS)의 최근 보고서는 이런 바탕에서 미 의회가 핵무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수명 연장 프로그램을 유지할지, RRW 시스템을 도입할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NNSA는 신형 핵탄두의 개발 및 양산을 위해 2008년까지 의회 승인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 러시아의 전략무기 현대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7일 하원 연설에서 사거리 8000km에 이르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불라바(SS-NX-30) 미사일을 올해 안에 실전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시험 발사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력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 수중 배수량이 1만8000t에 이르는 보레이급 전략 핵잠수함 8척 확보 계획도 강조했다. 지난해 말부터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토폴-M을 배치하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신형 SLBM과 신형 핵잠수함까지 결합해 핵전력 3각축(triad)을 완비하겠다는 계획이다.
나아가 니콜라이 솔롭초프 전략미사일군 사령관은 19일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상을 거론하며 “러시아는 1987년 옛 소련과 미국이 맺은 중거리핵전력제한협정(INF)에 따른 미사일 개발 중단을 철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란드와 체코에 미군의 MD 배치가 결정되면 이 시설을 공격 목표로 할 것이라며 중거리핵미사일 배치 의사를 나타낸 것.
다분히 미국의 MD 체제를 겨냥한 것이지만 이런 분위기는 냉전 시기의 핵 감축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새로운 대결구도를 연상시킨다. 미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을 깨고 MD 체제 개발에 나선 데 대해 러시아가 정면으로 승부하는 양상인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대량 보유로 맞서던 과거 핵무기 경쟁을 질로 승부하겠다는 자세다. 일례로 사거리가 1만 km 이상인 토폴-M은 다탄두 미사일로서 비행 중 방향 전환이 가능해 MD 체제를 뚫을 수 있다고 러시아는 장담한다.
러시아는 올해 국방 예산을 8210억 루블(약 310억 달러)로 책정했다. 불과 5년 전인 2001년(81억 달러)에 비해 4배나 증가한 것. 물론 총 7100억 달러에 이를 미국의 국방 예산에 비춰 보면 아직은 부족하지만 전략무기 현대화 추진에는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지적이다.
○ 다른 강국들의 움직임
올해 초 위성요격(ASAT) 실험을 했던 중국도 핵전력 강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6월 사거리 8000km의 SLBM ‘쥐랑(巨浪)-2’ 발사에 성공했다. ‘쥐랑-2’는 중국이 2002년 개발한 이동식 다탄두 ICBM ‘둥펑(東風)-31’을 잠수함 발사형으로 개조한 것. 중국은 이를 ‘094형’ 핵잠수함에 장착하는 작업을 벌여 왔다. 이는 중국도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SLBM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핵전력 3각축을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지난해 12월 “불량국가들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핵 억지력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 위험한 일”이라며 차세대 핵잠수함 건조 계획을 포함한 핵무기 현대화 구상을 발표했다. 현재 뱅가드호를 비롯한 핵잠수함 4척을 차세대 잠수함 3척으로 교체해 현재 보유한 트라이던트 핵미사일 시스템을 현대화한다는 것.
한편으로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저지를 외치는 강대국들의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사고 있지만 이 같은 핵무기 보유국들의 핵무기 현대화 계획은 이제 걷잡기 어려운 무한 경쟁 양상으로 번지는 듯하다.
김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