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몽사(醉生夢死). 그 해독불가의 암호
1932년 생이니 강태열 시인은 우리 나이로 예순 아홉살이다.
그가 생애 최초로 쓴 시는 '똑딱선'이란 동시고, 그 때 강 시인의 나이 13살이었으니 시력(詩歷)이 56년에 이른다.
한국의 어지간한 중진시인 나이에 육박하는 만만찮은 세월이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2000년 5월7일까지 자신의 이름이 인쇄된 시집 한 권을 가지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고희를 목전에 둔 지난 5월8일 시집 두 권을 한꺼번에 상재했다. <뒷窓>과 <우주영가(宇宙靈歌)>.
강태열 시인을 이야기할 때 늘상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술'.
필자의 기억 속에 강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지난 7월 12일 채광석 시비제막 행사에서도 그는 이틀 내내 만취해 있었고, 취재 때문에 가끔 들르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나는 그도 늘상 술이 오른 불콰한 얼굴이었다. 작가회의 앞 목로 '아현 호프'에서 보는 그도 다를 바 없었다.
無化된 정신이 有로 사는 곳
무화된 정신이 유로 빛나는 곳
노자가 사는 우주의 시원
살아 생전에 갈 수 없는 그 궁극으로
잠자면 열릴 꿈길 따라 오라 합니다
술 취하면 열릴 술길 따라 오라 합니다
--'우주영가 2' 중에서
강 시인은 왜 그 가난했던 시대 대학(전남대 철학과. 이후 동국대 철학과 편입)까지 졸업한 인텔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길을 걷고 있을까? 필자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해독이 불가한 의문을 품고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이제 아무도 그를 모른다
강태열 시인을 만나기 전 평론가 방민호와 고영직에게 전화를 넣었다. 30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지만 나름의 일가를 이룰 것으로 평가받는 영민한 청년문사들. 그러나 왠걸. 그들은 강태열의 시와 문학에 대해 어떤 도움말도 필자에게 주지 못했다. 평소 후배에 다름 아닌 나의 문학적 의문에 막힘없이, 거침없이 조언을 주던 그들답지 않다. 방민호가 겸연쩍게 덧붙인다.
"우리가 그 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기사거리겠군요".
결국 강 시인에 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만나러 나선다. 지난 8월23일 오후 인사동 '귀천'(歸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인은 벌거벗고 태어나 벌거숭이로 가는 존재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을 일찍 도착했건만 백발성성의 노시인이 나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 '귀천'은 강 시인의 친구 천상병(시인. 작고)씨의 아내가 하는 찻집이다. 탁자 서너 개가 오밀조밀 놓인 좁은 공간. 인스턴트일망정 커피향이 빗소리와 잘 어울린다.
다음은 마주 대면하고 담배 피우는 것이 송구스러워 한 시간에 한 번쯤 자리를 일어서 끽연을 해가며 강태열 시인에게 다섯 시간에 걸쳐 직접 전해들은 자신과 시(詩),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여수에서 보낸 강 시인의 유년은 극악했던 일제 말기의 폭격과 동시에 평화로운 바다풍경이 겹쳐지는 극명한 대조의 시간이었다.
부친 강현준과 모친 정소복의 장남인 소년 강태열은 몸이 약해 부모의 눈물바람을 먹고 컸다. 그러한 병약은 그에게 또래의 아이들과 바깥에서 뛰어 노는 시간은 뺐었지만 방안에 칩거해 독서와 사색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준다. 그는 그림과 글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파리한 얼굴의 조숙한 '소년 예인(藝人)'이 된다.
광주 서중 1학년 재학시 강 시인은 문우였던 박봉우(시인. 작고), 윤삼하(시인. 작고), 주명영(시인) 등과 함께 <진달래>라는 문학동인을 결성, 문집까지 낸다. <진달래> 동인들이 전라남도에서 열리는 청소년 문예현상공모와 백일장 등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이듬해엔 광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된다. 그 혼돈 속에서도 그는 16살 어린 나이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구해 읽는 '지식에의 열정'을 잃지 않는다.
학제가 개편되면서 그와 그의 문우들 대부분은 모두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1학년, <진달래> 동인들은 조숙하게도 4인 시집 <상록집>을 상재한다. 당시 조선대 교수였던 김현승 시인을 스승으로 모시며 이들은 시 품평회와 시 낭송회 등을 가지며 희희낙락한다. 근처 여고생들에게 그들의 인기는 요샛말로 "서태지 뺨을 치고 얼를 정도".
첫사랑의 기억들이 없을 리 없다. 고교생 박봉우는 전남여고의 홍수자, 곽명자 등과 어린 로맨스를 만들어 갔고, 강태열에겐 이일출이란 갈래머리의 여고생이 있었다.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좀 더 해주시죠"
"뭘... 그런 걸 자꾸 물어요"
그의 미소 속에서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나온다.
그가 앙드레 지드의 작품과 동명인 처녀소설 <좁은 문>을 쓴 것도 그 즈음이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나냐고 물었다.
"그럼요. 6.25 때 부모를 잃은 소년의 전쟁 극복기였죠."
필자는 조금 놀란다. "이미 40년도 더 된 작품의 제목과 내용까지".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막걸리집으로 옮겨 인터뷰가 진행된 밤 9시까지 작품의 연도와 사람의 이름, 그 내용까지를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 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 이런 그를 '고주망태의 낭인'으로 폄하하는가?
부모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아버지는 어린 강 시인에게 "언제나 욕심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뜻을 받들고 산 탓일까? 강 시인은 아직 지상에 자신이 누울 방 한 칸이 없어 지하방에서 생활한다.
"어머니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언제나 열심히 도와주셨지요. 1930년대엔 무척이나 귀했던 '파스텔'도 그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구해다 주실 정도로..." 시인의 눈이 붉어진다. '어머니'란 단어는 70살 노인에게도 언제나 '그리움'과 '눈물'로밖에 기억될 수 없는 것일까.
1954년 강 시인은 전남대 철학과 입학한다. <진달래>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박봉우, 주명영을 비롯 정현웅 등이 모두 같은 해 전남대 '프레시 맨'들이 된 것. 그들은 중학교 시절부터 동인집을 발간했던 발칙한(?) 능력을 십분 발휘, 김정옥(현 문예진흥원장) 박성룡 등과 의기투합하여 55년 1월 동인지 <영도(零度)>를 펴낸다.
전후(戰後) 피폐한 문단 상황. 55년 1월에 창간돼 오늘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는 문예잡지 <현대문학>이 <영도>가 발행되었다는 광고를 무료로 실어줄 정도였으니 당시 <영도>가 가졌던 위상을 짐작이 가능하다. 시인 김정환의 표현대로라면 '놀라운 센세이션'이었던 것이다.
'센세이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4월 발간된 <영도> 2집이 나오자 몇몇의 젊은 문사들이 참여를 원한다. 이 일(미술 평론가), 박이문(불문학자), 이어령(전 문화부장관)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만장일치제로 새로운 성원을 뽑는다는 <영도> 동인의 원칙을 이 일 만이 넘었을 뿐 박이문과 이어령은 참여를 거부당한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도 잠깐. '어느 잡지에도 추천받지 아니하고, 어느 신문 문예공모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영도>의 이 '비장미마저 감도는 강령'은 이듬해를 못 넘기고 파기된다.
55년 여름 동인지 발행의 자금줄이었던 강태열은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고, 그해 가을 박석룡은 <문학예술>가 추천한 '가을'이란 시로 기성문단에 진입했다. 강 시인의 '깨복쟁이' 친구 박봉우도 56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을 당선시키며 의기양양 상경한다. 그들만이 아니라 <영도> 동인 거의 대부분은 62년까지 모두 중앙문단으로 '금의입성'한다.
그들의 주활동 무대가 전남대 앞 용봉동에서 서울의 명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제 말 그대로 '전성기 때 강태열' 이야기다. 그의 명동 주유기(酒遊記).
"아직도 그 시절 명동거리가 눈에 선해요"
'귀천'에서 막걸리집 '풍류세상'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인터뷰. 시인은 밥을 사겠다는 필자의 제의를 한사코 거부하고 술이나 한잔 하겠단다. 젊은 시절 즐겨 먹었다는 삭힌 홍어에 김치를 얹어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마신 노시인의 혈색이 보기 좋다.
강 시인의 50년대와 60년대는 그의 문우들과 술을 빼놓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
물론 5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불심검문에 걸려 창졸간에 다녀온 군대 이야기와 59년 동국대 철학과로 편입학한 이야기, 60년 1월에 <사상계>에 '뒷窓' '음악' '벽화'를 발표하며 조지훈(시인. 작고)과 박남수(시인. 작고)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야기, 62년 평생의 반려자 이정순과의 만남과 '은성'과 '남산 공원'에서 즐긴 데이트 이야기, 서정주(시인)가 주례를 맡았던 경복궁에서의 결혼식 이야기 등도 재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50년대와 60년대 강 시인의 모든 진솔한 이야기는 명동과 무교동,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되고 그 거리에서 끝이 난다.
그 시절 명동에서 함께 술 마시는 것으로 답답스런 청춘을 위로했고, 때론 드잡이도 했으며, 서로의 어깨를 걸고 취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던 사람들. 다음은 강 시인이 선후배, 친구 혹은 선생으로 만나 함께 술 마셨던 문인들에 대한 인상평이다.
"미당은 언어의 마술사지요. 그러나 자기도취에 빠져..."
수차 고백한 바 필자는 나이 서른에도 아직 '시인 지망'의 철없는 아이인지라, 책의 표지에 찍혀있는 사진으로 밖에는 본적이 없는 박인환(시인. 작고), 김수영(시인. 작고), 김관식(시인. 작고)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강 시인은 필자의 이런 궁금증에 친절히 답해준다.
"박인환요? 둘도 없는 멋쟁이였지요. 그가 '동방싸롱'에서 '문예싸롱' 방향으로 그 긴 팔을 휘적이며 걸어갈 적이면 명동의 예쁜 여성 모두의 눈길이 집중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시를 너무 남발했어요. 다방에 앉아서도 시를 쓸 정도였으니..."
"김수영은 아주 데까당했지요. 술 마시면 어떤 말도 거침이 없었고. 게다가 아집이 대단해서 자기 글을 고치는 걸 못 봐요. 67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을 꼬박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조지훈요? 그 무게가 실로 거대한 산과 같은 사람이었죠. 그의 호방함은 비교대상이 없었어요. 자신의 저서이기도 한 <지조론>을 술집에서 주로 강의했지요.(웃음) 제가 가지고자 애썼던 '선비정신'도 절반 이상이 조지훈에게 영향 받은 거예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유치환이 마산에서 서울로 올 적이면 '아리스 다방'에서 만나 밤새 술추렴을 하곤 했지요. 그도 호탕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인이었고. 69년에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땐 '청마(유치환의 호)가 하늘에서 오는 줄만 알았는데, 하늘이 데려가는구나'라고 한탄하며 많이 울었지요"
"미당(서정주의 호)은 언어의 마술사지요. 그러나 자기도취에 빠져 시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미당이 출마를 찬성하는 연설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 진위를 물었더랬습니다.
그랬더니 미당이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져 군인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야. 군인이 정치를 안 하면 안 되는 시절이야'라고 답하더군요. 그날 이후론 해마다 가던 세배를 안가요. 아직까지도. 물론 주례까지 서준 은사니 내심 미안한 마음도 있긴 하지요"
"고 은(시인)요? 낮엔 남산에서 밤엔 명동에서 술을 자주 마셨지요. 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마시던 친구지요"
"김관식은 천하에 둘도 없는 호연지기를 지닌 친구였지요. 60년 9월에 장 면(전 부통령. 사망)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붙지 않습니까. 보통의 사람이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출마의 변도 얼마나 '호방담대'합니까. "천하의 못된 놈들이 정치를 해서 세상이 이렇듯 시끄럽다. 시인들이 나서 이 잡스런 판을 정리해야 한다". 그 친구의 홍은동 저택(?)에 가서 수 차례 술도 마시고 그랬지요"
"내 친구 박봉우는 다혈질에다 흥분을 잘했어요. 그래서 결국 정신병자란 오명까지 쓰게되고... 하지만 누구보다 친구를 아끼는 의리의 사나이였지요. 아이 둘을 낳고야 파고다 공원에서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는데 내가 사회를 봤지요. 꽹과리와 북을 치고, 오징어에 소주 마시던 피로연과 술 취해 잃어버렸던 바바리 코트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천상병(시인. 작고)은 평생 자기집을 가지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바로 자기집이 된 사람이지요. 순박하고 순수하기가 꼭 어린애였지요. 너무 똑똑한 친군데 시대를 잘못 만났지요"
"구자운(시인. 작고)은 내가 본 최고의 선인(善人)이었어요. 문청의 객기만 가진 것이 아니라 생활의 소중함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지요. 시도 깊이가 있었고. 굳이 표현하자면 신선을 희구하는 시적 취향이랄까..."
강 시인의 목소리가 회한에 젖는다. 술에 취하면 친구집에 몰려가 부부의 방 한가운데에서 잠들곤 했던 그 거친 '낭만의 시대'가 다시 그리워져 오는 걸까?
"예술지상주의는 미친 소리다"
60년대 강 시인은 다종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한 달에 서너 편씩 시를 기고했다. 당시 불거졌던 '순수와 참여 논쟁'에서 강태열은 언제나 참여 쪽이었다. 그가 존경하는 시인이 윤동주(시인. 작고), 이육사(시인. 작고), 이상화(시인. 작고)였다는 것에서 그의 분명했던 태도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아직도 "5.16 군사 쿠테타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커다란 굴욕감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더불어 "시대에 대한 고민 없는 예술지상주의는 미친 소리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정작 왕성한 활동으로 자신의 시 작업을 정리하고, 후진들을 길러내야 할 40대 나이의 강태열은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70년대와 80년대 내내 나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71년 그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환갑잔치날 수경사로 연행된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일임에도 강 시인은 아직도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할 뿐, 체포의 구체적 이유를 듣지 못했다.
그들이 억지로 덮어씌운 죄목은 '탈영'. 이미 12년전 육군정보부대에서 병역을 마친 그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죄목이었다. 결국 한 달간의 구치소 생활 끝에 '탈영 무혐의'로 석방되기까지 그가 받은 충격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74년 1월 9일엔 문인들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명동 '설파 다방'에서 발표한다. 이 일에 연루된 강태열은 고은, 조태일(시인. 작고) 등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는다. 이 때의 상황을 그는 그의 시집 <뒷窓>에 '패주기'(敗走記)라는 연작시로 남긴다.
그 사건들 이후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요시찰 인물이었다. 78년 모대학에서 강의를 맡을 뻔도 했지만, 위의 전력들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부당했고, 직장도 없이 10년을 궁핍하게 살아냈다. 생각컨대 한 인간에게 역사가 저지를 수 있는 패악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출판 기념회 "아내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더군요"
강태열 시인은 경기도 부평의 지하 셋방에서 혼자 산다. 장성한 아들 셋은 모두 분가를 했고, 아내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아직도 직장을 나가고 그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한다. 젊은 시절 집안을 돌보지 않고, 시와 술에 미쳐 떠돈 세월에 어찌 후회가 하나도 없을 수 있을까.
"아이들이 한창 커가던 80년대 중반까지 애비 노릇을 못했어요.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자식들에겐 아무 것도 줄 게 없어요. 늘상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너희들 앞을 스스로 열어가라.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살았지만... 막상 이렇게 늙고 보니, 숟가락 하나 물려줄 수 없는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요. 죽어도 눈이 감기지 않을 정도로..."
강 시인이 지난 5월 9일 프린스호텔에서 있었던 출판 기념회 이야기를 기껍게 꺼내놓는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평생을 시집 한권 없이 살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말년에 한꺼번에 두권이나 시집을 내니 일생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고요. 동국대학교 31년 후배인 막내 며느리도 '말로만 들었는데 이제야 시아버지가 시인인 게 실감이 난다'고 그러고요. 문우들과 가족들, 지인들 100여명이 모여 아주 즐겁게 지낸 하루였어요"
노시인의 50년 해묵은 공력이 만든 시가 마침내 책으로 엮어져 그 일을 경하하는 자리. 당시 강 시인의 기쁨이 어렵잖게 내게도 전해진다. 동시에 현란한 수사학과 얄팍한 지식으로 매명(賣名)을 위해 잡스런 글을 남발하는 위인들은 평생 가야 이런 감정을 가지지 못할 불쌍한 사람들이란 생각도 함께 온다.
새로운 세기를 살아갈 청년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주문한다
강태열 시인과 함께 한 5시간 남짓.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내뱉어진 다음과 같은 말들이 아직도 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인의 사유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 중심이란 권력이나 자본이 아니다"
"우주는 원래 가난한 것이다. '무유공'(無有空)이란 말이 있다. 이게 바로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 아니겠는가"
"시인이란 존재하되 가난하다. 그래서 시인이란 우주와 같은 존재이다"
"지구에서 시인이란, 지구적인 삶의 마지막 보루다"
"시란 저항정신의 섬광이며, 새로운 비전을 불러들이는 우주를 향한 기도문이다"
얼핏 듣기에는 노승(老僧)이 던지는 화두(華頭)와 같은 말들이다. 그러나, 강태열 시인이 살아온 70년 세월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사람이라면 위의 말들이 난잡한 말장난이 아니라, '삶 '이라는 부정 불가능한 살점이 붙은 선지피 '뚝뚝' 떨어지는 언어라는 것을 알게된다.
강 시인은 아주 구체적인 충고도 젊은이들에게 아끼지 않았다.
"요새 젊은 시인들은 자기탐구나 현실에 대한 자기저항이 아닌 자기미화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요. 현실에서 발을 뗀 미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머물러서 문학을 통한 자기구현이 될지 심히 걱정스러워요"
"무너진 성도덕과 형형색색으로 머리 염색을 한 청년들요?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그런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자기를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요"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시를 쓰겠다는 노시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시죠?"
해놓고 보니 이따위 우문(愚問)이 없다. 그러나 시인은 현답(賢答)한다.
"앞서 내가 언급한 것들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삶이지요".
술길 따라가다 만난 우주(宇宙), 그칠 수 없는 노래
저 친구 눈물 흘리네
나무 끝에 집 짓고 사는
까치를 보고
눈물 흘리네
왜 우는가
저 까치집 뒤 하늘이
너무 푸르구먼
우주가 너무 푸르구먼
--'어느 날의 박용래 시인은' 전문
며칠 전부터 레비 스트로스를 두 번째 읽고 있다. '문명' 속에서 사는 우리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민족을 '야만'으로 구분하는 짓은 얼마나 '야만스런 짓'인가. 시인의 삶을 세속의 잣대만으로 재단하려는 것 또한 얼마나 '야만'스러운 일인가.
이성부(시인)는 강태열을 '가치를 찾아가는 구도의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우주영가> 발문에 쓰고 있다.
김정환은 '열려있는 낙천적 민중성을 가진 시인'이라고 강태열을 평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면 또 어떨까. 그들의 평이 있기 전에도 강태열은 시인이었고 아직도 여전히 그러하거늘. 단지 우리가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라면, '우주가 너무 푸르러서 눈물이 난다'는 다 큰 시인의 아이같은 성정을 실소로 넘기지 않는 이해심과 포용력일 터.
육당(최남선의 호)에게 사사받아 그 한문실력이 열다섯에 한자교본을 내고, 시경(詩經)을 번역할 정도였다는 김관식 시인. 강 시인이 친구였던 '호연지기'의 김관식 시인이 만약 여지껏도 살아있다면 한말의 술을 마시고 대취해 이런 말쯤은 하지 않았을까?
"모두 당장 일어나 책방으로 가라. 가서 내 친구 강태열이의 시집을 사라. 거기에 '우주'가 있다. 이놈들아!"
출처 : http://poet6.tistory.com/entry/%EA%B0%95%ED%83%9C%EC%97%B4-%EC%8B%9C%EC%9D%B8%EC%9D%84-%EB%A7%8C%EB%82%98%EB%8B%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