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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서 본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25. 09:16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어린 시절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나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에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그뒤 경남 김해의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1학년을 외상으로 입학하였다.[5]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5]


청소년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다니다가[5]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5] 그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5]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동향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오석의 둘째 딸 권양숙과 1973년 결혼해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그러나 신세한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권양숙의 내조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증언이 있다.[6]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에 유신시절인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학력

대창초등학교
김해 진영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1998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수료
1999년 고려대학교 정치대학원 최고위지도자과정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7년 6월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5]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딩기)[7]를 즐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8]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거쳐[5]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5]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5]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치 입문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1988년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5],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5]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7년 12월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구절이 문제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기도 했고[5] 1989년초 국회 5공비리·광주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번복, 이를 다시 거둬들이기도 했다.[5] 한편 이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9]


정치 활동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10]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합당 참여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5] 그리고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한 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듬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대한민국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그는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과 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과 김원기, 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며 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11],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2000년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대통령 선거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 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선명히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새천년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지방선거(6·13)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지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는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이상 가나다순)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를 차례였는데, 이변은 바로 그 광주 땅에서 시작된다. 부산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당당히 득표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을 지어내며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노무현은 당시 광주 1위를 기록한 다음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노풍: 盧風),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경선 끝자락이었던 경기 경선에서는 정동영이 1위 차지.)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한 빌미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 민주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아들은 홍업씨와 홍걸씨의 비리로 국민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시장을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후보로 내세움.)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에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 정풍(鄭風)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 민주당에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용학(새천년 민주당 대변인 등 당직 역임)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은 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여론조사1: 노무현 승리, 여론조사2: 무효-이회창 지지율 낮음, 역선택 의심)

그리고 마침내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이어 노무현은 참여 정부를 표방하며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 ..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 .. 』라는 유서로서 생을 마감하신 노무현 전대통령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출처 : http://www.ibokorea.co.kr/tt/entry/%EC%9C%84%ED%82%A4%EB%B0%B1%EA%B3%BC%EC%97%90%EC%84%9C-%EB%B3%B8-%EB%8C%80%ED%95%9C%EB%AF%BC%EA%B5%AD-%EC%A0%9C16%EB%8C%80-%EB%8C%80%ED%86%B5%EB%A0%B9-%EB%85%B8%EB%AC%B4%ED%9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