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레너드 코페트는 타격을 '무서움'으로 정의한다. 타격은 자신의 몸을 향해 공이 날아올 때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반사 동작'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타자가 공을 강하게 쳐내려면 날아오는 공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을 무서워하는 인간적인 본능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결국 "타자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최선으로 공을 때리려는 욕망과 피하려는 본능의 억제 사이에서 싸우는 것"이라는 얘기다.
20일 열린 일본과의 WBC 경기에서 우쓰미의 공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이용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코페트가 이야기한 본능적인 '무서움'을 온 몸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홈플레이트에 바짝 달라붙는 특유의 타격 스탠스를 당장 뒤로 물리고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가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용규는 머리에 공을 맞았고, 쓰러져 한참을 뒹굴었다. 그는 투수를 노려보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이 몸에 맞는 공은 경기가 일본의 6-2 승리로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한일 언론과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 우쓰미는 "너무 긴장해 내 몸이 아니었다"며 고의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용규는 타석에서 "우쓰미와 눈이 마주쳤다"며 고의로 맞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감독님 때문에 참았다", "사과를 요구한다", "다음에 만나면 복수하겠다" 등등 어록도 쏟아졌다. '경기에서는 졌지만 매너에서는 이겼다'며 한국이 보복구를 던지지 않은 것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과연 고의였을까? 고의였기를 은근히 바라는(양국간 적개심을 자극하기에 이만큼 좋은 호재도 없다) 어떤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여기에 대해서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여기에 개입될 이유는 전혀 없다. 우선 당시 상황이 일본이 2-1로 앞선 3회말 한국의 공격 원아웃 주자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클린업 트리오를 뒤에 두고 발빠른 주자를 일부러 내보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빈볼은 승부에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는게 일반적이다.
또 생각해볼 점은 몸에 맞는 공이 나온 뒤 우쓰미의 투구 내용이다. 타자 머리를 일부러 맞힐 정도의 강심장에 냉혈한이라면 상대가 몸에 맞건 말건 관계없이 계속해서 몸쪽으로 공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용규 다음 타자에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오던 대로의 투구를 계속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쓰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음 타자 김현수를 상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몸쪽 공을 제대로 바싹 붙여 던지지 못했다. 비록 김현수가 범타로 물러나긴 했지만 파울이 된 5구째와 마지막 7구째는 꽤나 위험한 -한가운데 높은- 공이었다. 결국 우쓰미는 김현수까지 처리한 뒤 곧바로 우완 사토시로 교체되고 말았다. 상대 머리를 일부러 맞힐 정도의 마귀같은 투수가 곧바로 다음 타자한테는 몸쪽 공을 못 던져서 쩔쩔맨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반론이 있을줄 안다. 처음부터 이용규를 노린 것이기 때문에 경기 상황 따위는 중요치 않다, 다음 타자에게 흔들리는 척 한 것은 연기일 뿐이다, 교체한 것도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다, 4년 전에 일본야구에서도 헤드샷을 했던 녀석이다 등등... 상상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했을 때 우쓰미의 공은 빈볼이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빈볼은 비신사적인가
이제 방향을 바꿔, 몸에 맞는 공에 대한 이용규와 한국의 대응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많은 야구팬들 사이에는(그리고 최근에는 선수들이나 기자들 사이에서까지) '빈볼은 비신사적인 행위'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타자 몸에 맞는 공을 던지는 것은 동업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격을 저하시키는 짓이며, 세상 무엇보다도 추악한 행위라는데에 견해를 같이한다. 이용규의 '사과 요구'나 몇몇 언론이 이야기한 '매너에서는 이겼다' 등은 바로 이런 관념에서 나온 것일 게다.
정말 그럴까? 앞서 레너드 코페트가 이야기한 타격의 정의가 '무서움'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투수는 마운드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타자가 최상의 밸런스와 타이밍으로 '자기 스윙'을 하지 못하려고 노력한다.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공에 대한 본능적인 '무서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코페트는 "투수들이 구사하는 모든 피칭 전술과 타자들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점은 바로 이 무서움과 그와 연결된 반사 동작에서부터 발전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타자 몸쪽으로 공을 바짝 붙여 타자가 피하도록 한 뒤 그 다음 투구는 홈플레이트 바깥쪽을 공략하는" 기본 투구 전술도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코페트에 의하면 "1930년대에 마운드를 휘어잡던 투수들은 타자의 머리를 겨냥한 몸쪽 공을 던져 뒤로 벌렁 나자빠지게 만든 후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찔러 타자를 잡아내는 요령을 신바람 나게 떠들어 댔다". 1960년대에도 타자가 "좀 더 강한 타구를 날려 보겠답시고 타석을 발로 팍팍 고르면서 덤볐다가는 영락없이 공이 머리로 날아"들기가 예사였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의 과거 전설적인 투수들은 대부분 타자들에게 '헤드헌터'라는 비난을 받곤 했던 게 사실이다. 몸쪽으로 공을 던지는 것, 그래서 타자를 겁주는 것이 투수의 일반적인 전술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아마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쓰게 되면서 투수들은 어릴 때부터 몸쪽 공을 던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메이저에 올라오게 됐고, 타자들 역시도 "몸쪽 공을 피하는 방법을 모르게 됐다". 게다가 선수들의 연봉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몸을 사리는' 풍조가 야구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에는 당연한 투구 패턴으로 받아들이던 몸쪽 공을 던졌다간 집단 싸움이 벌어"지는 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감독들은 흔히 타자 머리로 날아드는 볼을 '녹다운 피치' 또는 '브러시백'이라고 부른다는 게 코페트의 설명이다. 전자는 타자를 뒤로 벌렁 자빠뜨리려는 위협구의 목적을 나타내고, 후자 역시 '등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투수가 빈볼을 던지는 목적은 타자를 맞히는 게 아니라 "타자가 공에 맞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몸을 피하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고 다음 공에 적극적으로 대들지 못하도록 겁읋 주려는 전술적 의도가 담겨 있을 뿐"이다. 감독들 역시 "타자를 해치려는 뜻은 손톱만큼도 없지만, 타자의 몸쪽으로 위협구를 던지는게 필수 불가결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코페트는 도덕성은 '상대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타자가 안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타구가 투수에게 맞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듯이(투수가 타구에 맞는 빈도는 사실 몸에 맞는 볼의 빈도와 큰 차이가 없으며 대부분의 타자들은 투수쪽을 겨냥해서 타구를 보내려고 노력한다), 투수 역시 "안쪽 높은 공을 던질 권리가 있으며" 이를 피하는 것은 타자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투수가 타자를 맞히려는 의도가 완연히 드러났을 때인데, "투수가 고의적으로 맞히겠다고 작심한다면 빗나갈 리가 없다". 하지만 몸에 맞는 공의 대부분은 고의가 아니라 '맞아도 할 수 없다'는 자세로 몸쪽 공을 던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사실 타자 몸에 맞을까봐 몸쪽 공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는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던질 곳이 바깥쪽과 한가운데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몸쪽으로 기껏 던진다는 것도 가운데로 몰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심성이 고운 투수도 '몸 가까이 높게-바깥쪽으로 낮게'라는 투구 패턴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코페트의 지적 그대로다. 또 아무리 바깥쪽 공이 무기인 투수라도 모든 공을 바깥쪽으로만 던지다가는 스스로도 투구 감각을 잃을 뿐더러 상대에게 얻어맞을 확률도 높아진다. 몸쪽 공을 던져서 바깥쪽으로 쏠린 타격 밸런스를 흐트러놓고, 타자가 뒤로 조금이라도 물러나게 해야만 바깥쪽 공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떤 식으로 투구를 하든 몸쪽 공 -타자 몸에 맞을 수도 있는- 은 필수적이다.
야구역사를 장식한 위대한 투수들이 하나같이 알아주는 '헤드헌터'였던 것은 그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같은 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투수의 기본적인 권리인 몸쪽 공을 효과적으로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 피하지 않고 맞더라도 난 모른다. 하지만 공에 맞고 싶지 않거든 너의 그 이상적인 타격 밸런스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는게 좋을 거다. 네가 그렇게 당당하게 버티고 있으면 나는 던지고 싶은 곳으로 마음놓고 던질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어서 빨리 피해!"라는 심정으로 타자를 상대했다. 비록 성인군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싸이코패스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우쓰미가 이용규를 맞힌게 잘한 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다만 야구팬들이 갖고 있는 '빈볼은 무조건 나쁘다', '타자 몸에 공을 맞히는 놈들은 악마다'라는 식의 고정관념이 야구의 본질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빈볼은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흔히 이야기하듯 부도덕하고 추악한 일도 아니다. 그건 투수가 타자를 잡아내기 위한 필수적인 전술이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지 결코 사악한 의도를 갖고 저지르는 비신사적 범죄 행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빈볼 시비를 두고 자주 벌어지는 선악 논쟁은 팬들이 야구의 기본 원리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이제 빈볼에 대해 대처하는 법을 알아보자. 방법은 두 가지다. 코페트가 말하듯 "하나는 용기를 보여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보복하는 것"이다. 가령 이용규의 경우. 만일 그가 앞으로 몸쪽으로 공이 오기만 해도 움찔해서 뒤로 물러나거나 특유의 타격 폼이 흐트러지거나 정상적인 타격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건 투수가 던진 몸에 맞는 공이 완벽하게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투수가 아무리 그런 짓을 한다 하더라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용기를 과시한다면 빈볼은 효과를 잃어버린다. "그런 용기를 보여 주지 못한 타자는" 나중에 "또다시 빈볼 위협을 당하게 된다"는 게 코페트의 설명이다.
이 점에서 이용규가 보여준 모습은 고무적이다. 그는 22일 베네수엘라전에서 1번 타자로 출전, 상대 투수 실바가 계속해서 던지는 몸쪽 공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실바는 본래 좌타자에게는 몸쪽을 거의 던지지 않는 투수지만, 이용규에게 몸쪽 공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볼넷을 골라 출루했고, 이후 실바는 컨트롤을 상실한 채 7실점하며 패배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 만일 이틀 뒤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본전에서 이용규가 출전해서 상대가 던지는 몸쪽 공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건 몸에 맞는 공에 대한 완벽한 복수가 된다. 그때는 투수로서는 정말로 피해갈 곳이 없어지는 셈이다.
또 하나는 '보복하는 것'인데,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우리 타자가 고의적인 빈볼에 맞았다면, 동료 투수들도 상대에게 빈볼을 던지면 된다. "너희가 우리 편을 맞히면, 나도 너희를 맞히겠다". 때로는 이런 보복이 과열되어 난투극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지만, 빈볼에 대해 보복하는 것은 동료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든 팀워크를 보여주는 면으로든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한국이 빈볼에 대해 맞대응하지 않는 것을 두고 '매너에서 승리했다'고 자평하는 것은 꽤나 쑥스러운 노릇이다. 빈볼에서 도덕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듯 빈볼에 대한 보복을 '매너'라고 평하는 것도 현실과는 먼 얘기다. 만일 상대가 고의로 동료를 맞혔는데도 아무도 보복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다음에도 또 위협구로 동료들을 맞힐지 모른다. 눈에는 눈, 빈볼에는 빈볼.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야구 불문율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과연 우쓰미가 이용규를 맞힌 것은 고의였을까? 만약 고의였다는 게 확실하다면, 한국에게는 이틀 뒤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용규는 1번 타자로 나와 몸쪽 공에 아랗곳없이 맹활약을 펼쳐 복수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 투수들은 이치로나 후쿠도메 같은 간판 타자들에게 간이 탈장될 정도로 위협적인 공을 선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빈볼에 대한 복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 교과서니 에티켓을 따지는 것은, 다 야구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출처 : http://yagoo.tistory.com/2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