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복무 기간 동안에 사용했던 '군생활 회상록'을 꺼내 봤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백두산부대에서 소속 부대 배치 당시에 나누어주었던 일종의 앨범입니다. 지난 1988년에 입대했으니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이미 색도 바랬고 글자로 벗겨지는 등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을 넘기다가 초등학생의 '군군 아저씨에게'로 시작되는 위문 편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선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남아 있는데 편지봉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희가 보낸 편지에는 자신과 함께 엄마와 남동생의 사진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약 6 장 정도되는 사진인데 어쩌면 소중한 자신의 가족사진일지도 몰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선희는 아마도 당시 대구의 어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도 성은 없고 그냥 선희라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단어 구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선희도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살이 훨씬 넘었을 나이일 것입니다.
지금은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어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년전 근무하던 곳은 강원도 최전방이라서 학생들 위문편지도 다른 후방 부대들을 거쳐 제일 마지막에 받을 수 있어 일부 초등학생들 편지만 겨우 도착했었습니다. 아예 못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편지라도 하나 받으면 감개무량한 시기였습니다.
먼저 간단히 당시 선희의 편지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저는 고향이 대구이고 대구에서 자라고 있어요. 먼저 우리 반의 여러 이야기를 말씀드릴께요. 저희 반에는 말썽장이들만 모여서 지내고 있어 그런지 언제나 덤벙대고 작은 사고도 가끔씩 일어난 답니다.
저번에는 교실에서 제기로 탁구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내주신 편지를 내 친구가 빼앗아가서 아저씨와 나의 편지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들통날 뻔 하였지만, 내가 간신히 빼앗아 내용이 들통나지 않았어요.
아저씨, 휴전선을 지키실 때 북한 공산군과 마주보기도 하시죠. 그 때의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요.
저번에는 교실에서 제기로 탁구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내주신 편지를 내 친구가 빼앗아가서 아저씨와 나의 편지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들통날 뻔 하였지만, 내가 간신히 빼앗아 내용이 들통나지 않았어요.
아저씨, 휴전선을 지키실 때 북한 공산군과 마주보기도 하시죠. 그 때의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요.
선희는 연필로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여학생 다운 착한 심성과 함께 문장 실력이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에게 편지를 빼앗겨 간신히 되찾았다는 내용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당시 편지 보낸 시기는 1989년 10월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시절에 저는 위문편지를 상병 때 한 번 이외에는 받지를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위문편지가 선희가 보낸 셈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위문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남학생이어서 그런지) 군인에게 답장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 어린 마음에 속상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제가 군인일 때는 선희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희는 당시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살고 있었나 봅니다. 선희가 보낸 사진 중에 아빠는 없고 가족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고 산소에 남동생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선희는 아빠도 없이 자라다보니 일찍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듯 합니다. 가족사진을 여러장 편지와 함께 보내주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입니다.
당시에 갑자기 땅굴 수색 등 작전과 맞물려 혼란스러워지면서 어쩌다가 사진을 돌려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강원도 중동부전선에는 9월에 첫 눈이 내리고 다음해 5월까지 지긋지긋하게 눈이 내릴 정도였던 기억입니다. 그 기간동안에 제4땅굴 수색 작전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이라고 선희에게 가족 사진을 돌려주고 싶은데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추억이겠지만 군생활 회상록에 남겨진 '선희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선희에게 가족사진이라도 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보내지 못했지만, 선희가 보고싶어했던 당시 군인 아저씨들 사진입니다.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