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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몰락

thinks of 2009. 2. 27. 15:31
IMF의 몰락

한국인이라면 1997년 외환위기를 IMF위기로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시 외환 위기 자체가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졌는데, 이와 동시에 갑자기 등장한 IMF가 달러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주권국의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요구를 해대니, 많은 사람은 경제위기가 일어났기에 IMF가 개입했는지, IMF 때문에 경제위기가 일어났는지 조차 헛갈릴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한국은 IMF로부터 빌린 돈을 빠른 시일 내에 갚아버림으로 IMF의 영향력에서는 일단 벗어났지만, 그때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IMF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적 기관인 듯 느낌이 들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그렇게 무서운 저승사자처럼 보였던 IMF도 이번 경제위기를 맞아 존립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동유럽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IMF가 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IMF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IMF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IMF는 원래 브랜튼 우즈 체제의 한 부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이 주축이 되어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출범한 브랜튼 우즈 체제의 핵심은, 미국이 달러의 가치를 금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1온스당 35달러), 다른 나라들은 달러화를 기준으로 고정환율 (변동폭 상하 1%이내)을 유지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계적으로 환율이 급작스럽게 변동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간 무역을 하는데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 있죠.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많은 나라가 자국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리는 이른바 근민궁핍화 (Beggar-thy-neighbor)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말미암아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면서 결국 화폐가 다른 나라끼리는 무역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2차 대전 이후에는 서로가 안심하고 무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고정환율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죠.

브랜트 우드 체제는 각국 정부가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보유하도록 정해놓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달러는 세계 경제의 기축화폐로 자리잡게 되죠. 물론 "달러화를 많이 쌓아놨다가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가 나올 수 있지만, 이는 미국이 "달러를 가져오면 1온스당 35달러라는 비율로 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함으로 해결합니다. 따라서 미국만 금을 잘 관리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금을 사모을 필요 없이 달러만 보관함으로 자국화폐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체제를 만든다 할찌라도, 특정한 나라의 경제가 갑자기 위기에 빠지면서 환율이 급작스럽게 변할 가능성은 배재할 수 없었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브랜튼 우즈 참가국들은 국제통화기금 (IMF)을 창설하는데 합의를 합니다. IMF는 유동성 위기에 몰린 국가에 달러를 빌려줌으로 환율이 급작스럽게 변동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특정 국가에 문제가 발생해도 세계적인 고정환율 제도는 변함이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이상적"인 브랜트 우즈 체제는 1974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gold window를 닫음으로 (즉, 달러를 가져오면 1온스당 35달러라는 비율로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함으로) 깨지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 각국의 환율은 경제사정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죠. 하지만 세계적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해 탄생한 IMF는 여전히 살아남아 경제위기에 몰린 나라에 달러를 빌려주는 역할을 지속합니다.

이처럼 변화한 세계 속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던 IMF는, 최근의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여러 나라가 동시에 달러가 부족한 상황이 되자 자금 부족 상황에 몰렸습니다. 원래 IMF는 소수의 국가가 위기에 몰렸을 경우를 대비한 조직이기에, 지금처럼 수십개 국가가 부도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는 자금이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 IMF의 대출 가능 자금은 3000억달러까지 떨어졌는데, 보통 위기에 처한 나라에 수 백억 달러씩 대여하기 때문에 10개국 정도를 더 도울 수 있는 자금이 있는 셈이죠. 하지만 동유럽에서 새롭게 대출 받을 나라만 10여개국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금액은 금방 바닥이 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난 일요일 베를린에 모인 유럽 정상들은 IMF 기금을 늘리기로 의견을 모았죠.

IMF 기금 확충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IMF가 21세기에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브랜튼 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고정환율제가 사라진 지금, IMF가 여전히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기관인지에 대해 많은 회의가 일어나는 중이죠. 현재 미국은 세계 주요 국가와 통화 스왑 협정을 맺음으로 통화를 공급하는 중이고, 한국은 중국, 일본과 통화 스왑을 채결하는 등 국가간 통화 스왑이 외환 보유고를 늘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대두하는 중입니다. 또한 아세안과 한중일 외무장관은 최근 아시아 경제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CMI) 기금을 1200억달러로 늘이는데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통화 위기에 대처하는 노력이 다양해지면서, IMF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재정적자를 줄이고, 외국 자본에 문을 여는 등 경제를 개혁하도록 요구하는데, 이러한 IMF의 정책이 결국 부자 나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난이 나온다는 점도 IMF에게는 부담입니다. 특히 "나쁜 사마리아인" 등을 쓴 장하준 교수는 IMF, 세계 무역 기구 (WTO), 세계 은행 (World Bank)가 "악의 삼위일체" (unholy trinity)라고 강하게 비판하죠. 위기에 빠져도 IMF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나라가 많은 것도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죠.

IMF는 지금까지 비교적 큰 위기가 없는 세계에서 최후의 대출자 (lender of last resort)의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 세계적인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면 사라질찌도 모르는 처지가 되었군요. 과연 IMF가 이번 위기를 견뎌낼 수 있을 찌, 만약 IMF가 사라진다면 최후의 대출자 역할은 누가 하게 될찌 궁금합니다.

출처: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