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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비판--윤소영

thinks of 2009. 2. 20. 14:03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의 쟁점들*

 

윤 소 영**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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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과 공황

근대적 자유주의의 완성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의 경제법칙들

이윤율의 저하 경향과 반작용 요인들

 

 

 

체계적 축적과 공황

'금융 세계화'란 무엇인가?

아메리카 헤게모니 하에서 주변과 반주변의 지위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의 재개념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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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이러한 우위 덕분에 지성은 대중운동들과 함께 하며, 나아가 무엇보다도 대중운동들이 지나간 과오들을 다시 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대중운동들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바꾸는 것을 지성이 돕는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점에서 그렇고 또 이 점에서 그럴 뿐이다.

루이 알튀세르(1985)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

 

나는 작년 초에 출판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이라는 책에서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성격 논쟁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반성해 보기 위해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알튀세르-발리바르 또는 브뤼노프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아리기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을 접합해 보려고 시도했다.

 

한국 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반성은 내가 제출했던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특히 아메리카-일본 자본주의의 초민족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개념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른바 '3저 호황' 시기에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에 대한 비판으로 제출되었던 남한 자본주의의 이른바 '자립화' 테제 같은 쟁점들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논쟁에서는 남한에서 신자유주의의 전개로서 1980년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화의 파탄을 상징하는 1979 4월의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은 남한에서 신자유주의의 발단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부마 항쟁과 광주 항쟁, 10·26 12·12 같은 일련의 정치적 격변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1979∼82년 세계적 규모의 공황을 계기로 5공은 박 정권이 시도했던 신자유주의를 민영화-탈규제-자유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으로 체계화했다.

 

한국 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이러한 반성을 위해 나는 아메리카의 세계 헤게모니로서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와 체계적 축적으로서 법인자본 또는 그 초민족화로서 초민족적 법인자본이라는 아리기의 테제를 채택했다. 이 테제는 헤게모니적 축적 체계의 위기로 인해 '법인자본의 초민족화와 세계 헤게모니의 민족적 토대 사이의 모순'이 전개되면서 신자유주의가 출현하는 역사적 맥락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란 체계적 축적의 조건으로서 세계 헤게모니가 위기에 빠지면서 오히려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에 종속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제출되는 아리기의 테제는 공황기 경제정책 또는 경제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라는 브뤼노프의 테제와 결합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로써 1970년대 3자위원회의 출현과 1990년대 민주당의 집권에 따라 공황기 노동력 관리와 화폐 관리를 위한 새 케인즈주의가 등장하는 상황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1970년대 '새로운 국제분업'에 따른 '신흥공업국'의 출현과 1980년대 외채 위기, 1990년대 '신흥시장'의 위기에 따른 '신흥공업국'의 금융 위기라는 상황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브뤼노프를 따라 셰네는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의 주체가 바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이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법인자본의 지배구조'가 역전되고 직접투자와 증권투자가 결합함에 따라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금융 그룹'에 의한 '금융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세계적 축적'으로서 이른바 '금융 세계화'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과 공황

이 논문은 주로 아메리카 자본주의에 대한 뒤메닐의 분석에 근거하여 아리기-브뤼노프의 테제를 확인하면서 한국 사회성격 논쟁을 '애도'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뒤메닐은 자본의 조직 형태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을 특히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반작용 요인, 즉 고정자본을 절약함으로써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선례로는 1970년대 말까지 아메리카 자본주의를 분석한 카스텔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성격 논쟁에서 주요한 전거가 되었던 짜골로프 감수 {정치경제학 교과서} '자본주의 일반의 특수화' 테제에 따라 경제법칙의 실현 조건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카스텔스나 뒤메닐의 시도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뒤메닐의 분석은 소유자자본(enterprise)과 자유무역에서 법인자본(corporation)과 자유기업으로의 이행에 대한 아리기의 분석, 그 이행의 조건으로서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의 출현이라는 브뤼노프의 분석을 {자본}의 경제법칙과 관련하여 보완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특히 '공황으로의 경향'에 대한 설명이 쟁점으로 제기되는데, 이는 경쟁과 신용을 매개로 하는 '공황의 현실성'과 구별되는 '공황의 궁극적 원인(letzte Grund)'을 가리키는 마르크스의 개념이다.

 

발리바르는 이미 {'자본'을 읽자}에서 자본 축적의 한계를 두 가지로 구별하여, 각각 공황을 통해 극복되는 한계로서 'Grenze', 'limit of variation'과 생산양식의 전화를 통해 극복되는 한계로서 'Schranke', 'barrier'로 정식화한 바 있다. 그는 '경제변동'(economic fluctuation)의 다양한 시간성의 '교착'(imbrication, intertwinement)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3∼4년 주기의 재고 순환으로서 키친 순환, 7∼11년 주기의 고정자본 투자 순환으로서 주글라 순환, 15∼25년 주기의 건설 투자 순환으로서 쿠즈네츠 순환, 45∼60년 주기의 기술 혁신 순환으로서 콘드라티에프 순환, 그리고 아리기가 제시하는 체계적 축적 순환 중에서, 통상적인 의미의 '경기순환'(trade cycle, business cycle)으로서 주글라 순환, '장기파동'(long wave)으로서 콘드라티에프 순환, 체계적 축적 순환의 관계가 특히 문제일 것이다.

 

체계적 축적 순환의 A국면에서는 반작용 요인에 의해 이윤율 저하 경향이 저지되는데, 특히 체계적 축적 A국면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의 A국면이 이른바 '자본의 시대' 또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이다. 반면 체계적 축적 B국면에서는 반작용 요인이 무력화되고 이윤율 저하 경향이 관철됨으로써 '자본의 과잉-인구의 과잉', '금융화-궁핍화'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윤율 저하 법칙의 내적 모순의 전개'이다.

 

아리기는 체계적 축적 B국면에서 대공황, 대불황이 발발하는 과정을 두 단계로 구분한다. 우선 '징후적 위기'로서 최초의 콘드라티에프 B국면에서는 주글라 순환의 '일반적 위기'(general crisis) 또는 공황(crash)이 심화되어 최초의 대공황과 대불황으로 전화된다. 콘드라티에프 A국면으로 반전되면서 금융 주도 하에 이윤율이 회복되는 것이 이른바 '좋은 시절'(belle poque)이다. 그리고 다시 콘드라티에프 B국면이 전개되면서 '최종적 위기'와 두 번째의 대공황, 대불황이 발발한다.

근대적 자유주의의 완성

이상의 셰마를 마르크스의 {자본}에 따라 논증해 보기 전에, 우선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뒤메닐의 분석을 간략히 정리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북 전쟁이 끝난 1870년대 이후 아메리카에서도 독점화가 급진전되지만, 1890년 셔먼의 '반독점법' 이후 이른바 '자유기업'을 모토로 하는 지주회사에 의한 인수·합병을 매개로 거대 주식회사가 출현한다. 아리기, 브뤼노프가 강조하듯이 힐퍼딩에게서 비롯되는 독점자본-금융자본론은 아메리카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전의 독일-일본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좋은 시절'로서 이 시기는 이른바 '진보주의의 시대'(Progressive Era)라고 불리는데, 특히 카네기, 록펠러 같은 '악덕 자본가'(robber baron)에 의해 자선재단이 설립되고, 나아가 법인자본에 적합한 '교육 개혁'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 시기는 아메리카 정치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주의-진보주의 대 보수주의, 중도파-좌파 대 우파의 대립의 기원이기도 하다. 남북 전쟁 시기 공화당의 이상주의는 대불황기('징후적 위기') '현실화'하여 근대화된 보수주의-사회진화주-자유방임주의-고립주의로 전화한 반면, '좋은 시절' 또는 '진보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윌슨이 지도하는 민주당은 근대화된 자유주의-진보주의-개입주의-국제주의를 제시하게 된다.

 

1929년 금융 대공황에 이은 대불황('최종적 위기') 하에서 로저벨트가 뉴딜 정책을 도입하면서 아메리카에서 신고전파(neoclassicals)에 대항한 케인즈파(Keynesians)가 형성된다.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법인자본에 고유한 금융적 불안정성을 규제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재무부가 중앙은행을, 중앙은행이 금융을 규제하는 것이다. 또 글래스-스티걸 법에 따라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이른바 '겸업'을 분리시키는데, 이에 따라 '고도 금융'의 상징이었던 모건 그룹이 쇠퇴하게 된다.

 

나아가 케인즈주의적 적자재정 정책을 통한 '투자의 사회화'는 법인자본의 성숙을 촉진하는데, 이른바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법인자본의 지배구조'가 완성되는 것은 케인즈주의 덕택이다. 1920년대 포드주의가 제너럴 모터스로 상징되는 슬론주의로 성장·전화함에 따라, '선도산업'이 중화학공업-군산복합체를 토대로 하는 록펠러 그룹에서 내구소비재를 생산하는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제너럴 일렉트릭스(GE)로 이동하게 된다.

 

맥더모트나 제이틀린은 법인자본 하에서 계급 구성의 변모를 집합자본가의 형성과 집합노동자의 분파화로 특징짓는다. 이는 {역사유물론 5 연구}에서 발리바르가 정식화한 계급 분석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소유와 경영, 금융과 지배의 분화에 따라 법인자본의 상층 관리자 또는 임원, 기관투자가 및 주거래은행, 법률 및 경영 자문회사, 나아가 사외 이사 및 정부 관료 등으로 구성되는 집합자본가가 출현한다. 이른바 '법인자본의 지배구조'를 둘러싼 쟁점이 잠복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이해 갈등도 완화된다.

 

반면 사무직, 기술직, 전문직 관리자의 형성에 따라 전통적인 노동자로서 단순 사무직, 생산직과 구별되는 이른바 '신중간층'이 출현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귀족'이라기보다는 테일러화와 슬론주의에 따라 자본의 기능을 대행하는 이른바 '지식 프롤레타리아'이다. 중간 관리자가 프롤레타리아화를 영원히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분단노동시장'을 통해 양자가 분할 지배된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법인자본의 피고용자 또는 직원으로서 중간 관리자와 노동자는 이른바 '산별노조'를 통해 조직된다.

 

그런데 브뤼노프가 강조하듯이, 이러한 자유주의의 근대화, 개량화의 배후에서 대공황, 대불황뿐만 아니라 국제노동자운동, 단적으로 소련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소련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늘 주장했듯이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중국 혁명의 시대'이자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시대'였다. 아리기가 지적하듯이,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특징이 '소유권과 생존권-민족자결권의 접합'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불황에서 탈출하는 동시에 새로운 축적 체계를 조절하는 경제정책으로서 케인즈주의의 본질이 자유기업과 국가개입의 타협인 이유도 마차가지로 여기에 있다.

 

2차 세계전쟁 중 아메리카 케인즈주의는 강화·발전하여 윌슨의 '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을 실현하는 1941 '대서양헌장'에 의해 국제화의 맹아를 형성하고, 전후에는 '마샬 플랜'에 의해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로 성장·전화한다. 그런데 이는 냉전의 개시로 인해 로저벨트의 이상주의가 트루먼의 현실주의로 수정되고, 케인즈파가 '신고전파 종합'에 기초한 신케인즈파(neo-Keynesians)로 변모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에 따라 적어도 범대서양 차원에서 법인자본의 초민족화가 실현되면서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적 축적 체계가 완성된다. 나토(NATO)와 경제발전협력기구(OECD)는 범대서양적 규모에서 초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출현을 상징한다. 반면 동아시아의 경우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한 아메리카의 이른바 '역개방'(Reverse Open Door) 정책은 재벌의 온존을 용인하게 된다. 이를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이중 논리로서 '초민족화' '지역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징후적 위기' 하에서 아메리카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이른바 '3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출현한다. 3자위원회의 성원인 카터는 1979년 연방준비이사회 의장으로 같은 3자위원회 성원인 볼커를 임명하여 신자유주의적인 '탈인플레이션'(disinflation) 정책을 도입하게 된다. 레이건의 신보수주의적 기습은 화폐주의적 고금리 정책 하에서 1982, 1987년 두 차례의 외채 위기를 발생시킴으로써 오히려 3자위원회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후 화폐주의는 새 고전파(new Classicals)로 변모하면서 이른바 '경제정책 무효론'을 주장하게 된다. 반면 케인즈주의는 저금리 정책에 의해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을 부양하는 새 케인즈파(new Keynesians) 로 변모하게 된다. 새 케인즈주의적 저금리 정책은 완만한 인플레이션에 의한 '공황의 할당'과 함께 산업 이윤율을 제고하려는 이전의 신케인즈주의적 저금리 정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쨌든 1990년대 클린턴이 집권하면서 도래한 '좋은 시절'의 배경은 금융 주도 하에 1970년대 초 수준의 이윤율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을 보통 '신경제'(New Economy)라고 부른다.

 

신케인즈주의의 새 케인즈주의로의 전화 과정은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금융 세계화'와 그것에 대한 국제적 군사 케인즈주의의 종속에 따른 것이다. 아리기는 특히 영토주의적 민족국가의 해체 또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네트워크에 의한 국가간 체계의 내부화에 주목하고 있다. 동일한 현상을 카스텔스는 '네트워크 사회', 사센은 '세계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브뤼노프는 근대적, 개량적 자유주의가 '반대물로 전화한' 것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민중적 대안도 자본주의적 대안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대중의 불안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일종의 미신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데, 이른바 '비교 자본주의론'이 제시하는 대불황으로부터 탈출에 대한 자본주의적 전망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안에서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의 'Grenze', 'limit of variation'이 있을 수 있더라도,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의 'Schranke', 'barrier'일 것이다.

 

독일형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비교 자본주의론자' 중에서 알베르는 3자위원회의 성원이고 아글리에타는 이제 새 케인즈주의자로 변신했다. 또 일본형을 주장하는 크로티나 라조니크는 새 케인즈주의와 공명하는 아메리카 '급진 경제학자'(radicals)이다. 여기서는 페일의 테제에 따라 '비교 자본주의론'을 간략히 비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페일의 테제는 아메리카 또는 영국, 프랑스와 비교하여 독일, 일본은 케인즈주의에 미달하는 수출지향적인 신중상주의로 특징지어지고, 스웨덴은 케인즈주의를 초과하는 복지국가로 특징지어진다는 뒤메닐-브렌너의 테제와도 친화성을 갖는 것이다.

 

페일은 마샬 플랜에 의해 유럽, 특히 독일 부르주아지가 범대서양적 규모에서 초민족화하는 과정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분단'으로 인한 법인자본의 수정을 지적한다. 이른바 '사회적 시장 경제'란 겸업은행과 독점자본의 융합에 의해 법인자본의 지배구조에서 겸업은행의 주도성을 유지하고 또 재무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또 이른바 '공동결정제'를 통한 '경영 참가'로 정당화되는 저임금경제와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케인즈주의를 포함하는 '관리자 혁명'에 미달하는 '사회적 시장 경제'는 아메리카 법인자본보다는 힐퍼딩 식 '금융자본'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동시에 나치의 국가-코포러티즘을 전화하는 포스트나치적 사회-코포러티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그 정치적 담지자도 아메리카적인 의미에서 중도좌파가 아니라 아데나워-에르하르트가 지도하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동맹 세력으로서 기민당이다.

 

1960년대 말 브란트가 지도하는 사민당 대연정에 이르러서야 독일에서도 아메리카적인 중도좌파가 출현한다. 이 시기 독일 자본이 초민족화를 통해 아메리카 자본과 경쟁을 시작하면서 사민당은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신국제경제질서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를 관리하는 3자위원회의 '다자주의'의 카운터파트 역할을 담당한다. '사회 통합' 없는 '금융 통합'으로서 유럽 연합을 계기로 사민당은 유럽식 신자유주의로서 '사회자유주의'를 이른바 '3의 길'로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또 독일과도 차이가 있다. 1945∼47년 맥아더의 점령군 총사령부는 지주회사를 해체하고 반독점법을 제정하여 재벌 해체와 법인자본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1947년 말 냉전이 시작되면서 재벌은 복원되어, 이른바 '발전국가'의 지도 하에 대기업의 계열, 그룹으로 전화된다. 그러나 독일과는 달리 증권거래법에 의해 은행의 겸엄을 금지하고, 재무부의 지도 하에서 중앙은행이 금융을 규제한다. 또 아메리카의 '역개방 정책'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특수를 계기로 수출주도 공업화를 추진하고, 1960년대 이후에는 구식민지였던 남한과 대만을 '후배지'(hinterland)로 통합하게 된다.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 엔고에 따른 경제의 거품화, 1990년대 초반 거품 붕괴 이후 발생한 대불황으로 인해 재벌이 초민족화되면서 일본에서도 신자유주의의 등장이 예고된다. 전후 일본 정치는 보수주의 연합인 자민당에 의해 지배되고, 1990년대 장기불황 속에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종식된 후에는 계속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다.

 

{자본}의 경제법칙들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는 1850∼60년대 런던 망명기에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도 {자본} 1, 3권 및 보통 {잉여가치 학설사}로 불리는 {자본} 4권의 원고를 작성하는 1857∼67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룬다. 20대의 격렬한 논쟁의 시기와 30대의 '창조적 유예'의 시기를 거쳐 40대에 이른 마르크스는 경제학 연구에 몰두한다. 마르크스는 청년기에 설정했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의 연구 계획을 '경제학 비판'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 시기 마르크스의 생산성은 실로 초인적인 것이어서, 1857∼58 1년 사이에는 {자본} 1, 3권의 최초의 원고인 {그룬트리세}, 1861∼63 2년 사이에는 그 3배 분량에 달하는 {자본} 1, 3권의 두 번째 원고와 4권의 유일한 원고를, 1863∼65 2년 반 사이에는 {자본} 1, 3 권의 세 번째 원고와 2권의 최초의 원고를 쓰고, 1867년에 드디어 {자본} 1권을 출판하게 된다. 5000쪽에 이르는 {자본} 4 6책은 10년에 걸친 집약적인 작업에 쏟은 마르크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셈이다.

 

자본주의 최초의 대불황이 시작되는 1870년대에 마르크스가 주기적 공황에 대해 거의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클라크는 이를 마르크스의 {자본} 원고에서 공황론의 지위가 눈에 띠게 변화한다는 사실과 관련시킨다.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는 주기적으로 발발하는 공황에 주목하지만, '1861∼63년 원고', '1863∼65년 원고', 그리고 {자본}에서는 오히려 공황의 '궁극적 원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으로서 이윤율 저하에 관심을 갖는다.

 

이 점을 {자본}의 경제법칙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서 경제법칙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우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의 이중적 결과로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 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이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과 사적-자본주의적 영유 사이의 '기본 모순'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기본 경제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경제법칙에 대한 반작용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는데, 생산의 사회화 및 노동자연합을 전제로 하는 '자기 자신의 소유'로서 개인적 소유의 확립과 집합노동자 내에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의 지양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노동에 대한 권리와 지식에 대한 권리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인권의 정치'가 바로 {자본}의 결론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시장적 조건을 표현하는 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저하는 기본 경제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경제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는 기본모순으로부터 '파생된'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사이의 모순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황의 '궁극적 원인'이란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사이의 모순, 축적과 그 시장적 조건의 모순이 공황을 통해 표현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잉여가치 생산과 잉여가치 실현을 종합하는 법칙이 바로 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저하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의미에서 파생된 경제법칙과 공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전화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자본}에는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브뤼노프, 아리기, 뒤메닐의 분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과 반작용 요인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으로서 이윤율 저하 경향은 법칙 그 자체와 반작용 요인들 사이의 내적 모순으로 이루어진다. 법칙 그 자체와 반작용 요인들 사이의 내적 모순의 전개를 통해 공황의 '궁극적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공황이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한다는 의미에서 공황의 '필연성' 또는 좀 더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필연적 생성'(becoming-necessary)은 경쟁과 신용을 포함하는 시장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법칙 그 자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 이윤율 저하로 표현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생산력 발전을 요약하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 잉여가치 실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내재적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불변자본 및 가변자본의 가치 저하로 표현되는 반작용 요인들인데,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상승시키는 생산력 발전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저하시키는 주식회사의 성립, 국제무역 또는 세계시장의 발전 같은 생산관계의 전화를 동시에 지칭한다. 전자를 법칙 그 자체와 동일한 원인을 갖는 논리적인 차원의 반작용 요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할 수 있게 하는 역사적인 차원의 반작용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뒤메닐이나 카스텔스가 지적하듯이, 법인자본 또는 그 초민족화와 케인즈주의라는 반작용 요인을 통해 역사적 자본주의로서 아메리카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다. 또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위기란 반작용 요인의 약화로 이윤율 저하가 관철되는 사정을 가리킨다. 동시에 공황의 형태가 변화한다. 아메리카의 경우 1974∼75년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공황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공황이 약화되어 완만한 경기후퇴만이 나타난다. 그 후 탈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1979∼82, 1990∼91년에 다시 격렬한 형태의 공황이 재발된다. 이러한 변화의 배후에는 반작용 요인의 약화로 이윤율 저하가 관철되었다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윤율 저하는 금융화를 야기한다. 금융 시장의 호황이 투기 거품의 '붕괴'(crash)로 금융 공황으로 전화하는 것을 정신의학의 용어를 빌려 'mania'(躁症)에서 'panic'(恐慌)으로 반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금융 세계화'란 일종의 '편집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브뤼노프와 아리기가 지적하듯이, 금융 순환이 산업 및 상업의 실물 순환에 대해서 '자율성'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즉 금융 공황은 산업 및 상업의 실물 공황과 평행한다.

체계적 축적과 공황

이윤율 저하와 공황의 관계는 체계적 축적 순환과 주글라 순환, 콘드라티에프 순환의 교착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아리기는 체계적 축적 순환을 정식화하는 {장기 20세기:화폐, 권력, 우리 시대의 기원들}(1994)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주글라 순환, 콘드라티에프 순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공황론 논쟁을 검토하는 [자본주의적 공황론을 위하여](1972, 1978) [관습과 혁신:장기파동과 자본주의적 발전단계](1986)라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 글들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아리기의 셰마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체계적 축적의 순환이란 시간의 변화에 따른 자본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실좋은'(well-behaved) S자형 곡선인데, 자본 성장율은 순환의 A국면에서 체증하고 B국면에서 체감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경제변동을 묘사하는 주글라 순환과 콘드라티에프 순환은 모두 이윤율 변동을 표시하고, 각각 A국면과 B국면에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저하한다. 그런데 자본 성장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체계적 축적의 순환과 주글라 순환 또는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일정한 방식으로 교착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체계적 축적이 A국면에서 B국면으로 전화하면서 축적 경로의 '분기'(bifurcation)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산업 및 상업의 '물질적 확장'과 고도 금융의 '금융적 확장' 사이에서 '교란'(turbulence)으로 특징지어지는 일종의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서 '체계적 카오스'의 발단이다. 이 때 콘드라티에프 순환도 B국면으로 진입하면서 최초의 대불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체계적 축적의 '징후적 위기'이다.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다시 A국면으로 진입하면서 금융적 확장의 주도 하에 물질적 확장이 재개되는 시기가 이른바 '좋은 시절'이라면,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또다시 B국면으로 진입하면서 물질적 확장이 붕괴되는 시기가 두 번째 대불황으로서 체계적 축적의 '최종적 위기'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내재적 한계'로서 '자본의 과잉-인구의 과잉', '금융화-궁핍화' '체계적 카오스'의 전과정을 특징짓는 것이다.

그렇지만 콘드라티에프 순환은 이론적 지위가 불명확하여 마르크스적이라기보다는 슘페터적인 공황론에 가깝다. 특히 만델이나 월러스틴이 지적하는 것처럼 A국면에서 B국면으로의 이행은 내생적이지만 B국면에서 A국면으로의 이행은 외생적이라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이다. 따라서 대칭적 '순환'(cycle)이라기보다는 비대칭적 '파동'(wave)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여기서는 체계적 축적의 순환과 주글라 순환의 교착을 설명하는 매개로서 어느 정도 묘사적인 의미로만 이용할 것이다. 이 점에서 카오스 이론의 관점에서 슘페터와 케인즈를 종합하는 굿윈의 '성장순환'(growth cycle)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콘드라티에프 순환은 본질적으로 주글라 순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콘드라티에프 순환 A국면에서는 주글라 순환의 호황이 강화되고 불황은 약화되는 반면, B국면에서는 호황이 약화되고 불황이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체계적 축적 순환의 B국면과 콘드라티에프 순환의 B국면이 중첩될 때, 주글라 순환에서 불황이 심화되어 대불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축적 체계의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란 최초의 대불황으로서 '징후적 위기'의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축적 체계가 헤게모니를 획득하여 두 번째 대불황으로서 '최종적 위기' 이후 새로운 체계적 축적의 순환을 시작할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상의 논리적 셰마를 1789∼1815∼1848, 1848∼1873∼1896, 1896∼1914∼1945, 1945∼1973∼1990년의 4개의 콘드라티에프 순환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리 밝혀둘 것은 각 시점이 논자들마다 차이가 있어서 여기서는 설명의 편의상 그 역사적 의미가 자명한 연도를 임의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아리기에 따르면 매 순환의 A국면은 소유자자본의 산업혁명,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교통혁명('자유무역 제국주의'의 전성기, 이른바 '자본의 시대'), 법인자본의 조직혁명, 조직혁명의 결과로서 통신혁명('자유기업적'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전성기,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 등 일련의 '기술혁명'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각각의 혁명은 면공업과 상업은행, 철도산업과 주식회사, 자동차·가전 등 내구소비재 산업과 지주회사, 전자산업과 법인자본의 자기금융 등 산업과 금융에서 '기술혁명'으로 세분된다.

 

1873∼1945년의 시기는 영국의 축적 체계와 헤게모니가 위기에 빠진 때부터 아메리카의 축적 체계와 헤게모니가 그것을 대체할 때까지 전개되는 '체계적 카오스'의 시기이다. 1873∼1896년의 시기는 영국의 헤게모니적 축적 체계의 '분기'로 인한 '징후적 위기'로서 대불황의 시기이다. 1896∼1914년의 '좋은 시절'에 시작된 민족자본 간 경쟁은 1914∼1945년 헤게모니를 둘러싼 민족국가 간 '30년 전쟁'으로 전화하는데, 그 사이 '최종적 위기'로서 1930년대의 대불황이 발생한다. 또 국제화폐체계의 붕괴에 따라 중심은 주변에서 식민지 재분할 투쟁에 돌입하고, 반주변에서는 파시즘-코포러티즘이 출현한다. 1945∼1973년이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적 축적 체계의 시기라고 한다면, 1973∼1990년의 시기는 그 위기로 인해 또다시 '징후적 위기'와 대불황이 전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금융 세계화'란 무엇인가?

1990년대를 아리기의 셰마에 따라 '좋은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콘드라티에프 순환이 이미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축적 체계의 진정한 '메타모르포시스'라기보다는 이전 시기의 통신혁명을 경쟁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정보화', '금융화'를 통한 '금융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다.

 

스트레인지, 헬라이너 등이 지적하듯이, 환율, 이자율, 유가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금융화를 시작하는 것이 이른바 '금융 세계화'의 본질이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외환 시장, 유로 통화시장 같은 단기 금융시장을 활용하여 현금 플로우를 관리하고 환투기에 개입한다. 그렇지만 국제자본시장, 유로 증권시장 같은 장기 금융시장에서의 투자도 투기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결국 '금융 세계화'란 국제화폐체계의 불안정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른바 '3극 체제'로의 국제화폐의 개혁이라는 3자위원회적 발상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브뤼노프의 비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3극 체제로는 민족화폐와 세계화폐의 혼동 속에서 민족화폐 간 항쟁의 지속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환율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가 본질적으로 투기적인 '금융 세계화'라는 것이다.

 

유로의 출범은 달러-마르크-엔의 형식적 3극 체제에서 달러-유로-엔의 실질적 3극 체제 또는 '2.5극 체제'로 이행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달러 헤게모니의 탈안정화는 가속될 것이고 동시에 '금융 세계화'도 가속화된다. 그렇지만 유럽 연합은 3자위원회의 신자유주의적 발상이고 신보수주의적인 몽 펠르랭 협회는 이에 반대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유럽의 화폐 및 무역 동맹이 아메리카에게 끼칠 피드백 효과에 대해서 잠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메리카는 현재 북아메리카에 국한되어 있는 자유무역협정(NAFTA)을 라틴 아메리카까지 확대하여 범아메리카적 자유무역협정(FTAA)으로 재편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동시에 달러-엔 동맹을 강화하려고 시도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세계무역기구(WTO)-국제화폐기금(IMF) 체제를 보조하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아시아-태평양 화폐기금'(APMF)의 구상이다. 국제화폐기금과 '아시아-태평양 화폐기금' 사이의 관계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아시아 개발은행(ADB)의 관계에 유비되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화폐기금'(AMF) 1997년 동남아 금융 위기 초기에 아메리카와 국제화폐기금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이 대안으로 제안한 구상이다. 이는 이른바 '엔 블록'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일환인데, 그 배경은 플라자 협정 이후 엔고에 따른 경제의 거품화와 거품 붕괴 이후 발생한 대불황으로 인한 일본 자본의 초민족화, 특히 남한과 대만, 이어서 동남아로의 도피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남한만이 일본의 구상을 지지한 데 반해, 일본을 제외한 선진 7개국과 중국은 이 구상에 반대한다. 또 금융 위기가 남한까지 '전염'되는 과정에서 일본 대신 아메리카와 국제화폐기금이 적극 개입하여 금융 개혁을 가속화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아시아화폐기금' 구상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의 틀 안에서 국제화폐기금을 보좌하는 '아시아-태평양 화폐기금' 구상으로 전화하고 있는 중이다.

 

아메리카는 범대서양 신자유주의와 범태평양 신자유주의를 축으로 하는 세계화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유럽 연합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가 전간기와 같은 생산지향적 블록화가 아니라 '금융개방적 지역화'를 지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물론 1929년 같은 금융 위기와 1930년대 같은 대불황이 재발해서는 안될 것이다. 금융 위기 및 자본 도피에 대처하기 위해 무역 및 화폐동맹을 체결하거나 투자협정을 통해 증권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이에 대한 유효한 처방인지가 관건일 것이다.

아메리카 헤게모니 하에서 주변과 반주변의 지위

아리기는 아메리카 헤게모니 하 세계경제에서 주변과 반주변의 지위를 다음과 같이 특징짓고 있다. 1970년까지의 하향 이동의 시기, 1970년대의 상향 이동의 시기, 1980년대 이후 반주변의 지위가 급락하여 '주변의 경계'로 이동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이를 각각 종속이론의 시대, 종속이론의 위기와 수출지향적 신흥공업국의 시대, 수출지향적 신흥공업국에서 금융 위기와 자본 도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반주변에서 중심으로 상향 이동한 사례로는 일본이 유일하다고 말하지만, 여기에 독일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패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경제 재건은 아메리카 헤게모니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1970년대 신흥공업국 현상은 주변과 반주변의 하향 이동의 추세 속에서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기는 '주변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을 제안한다. 그는 우선 전통적인 설명 요소들인 상품 이동, 자본 이동, 노동력 이동은 그 자체로서 주변화의 우연적 속성들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 때문에 종속은 부등가교환 외에도 기술-금융 종속, 정치-군사-문화 종속, 나아가 '자본의 도피' 또는 이른바 '두뇌 수출'이라고 불리는 고급노동력의 도피 등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지만 문제는 '종속의 구조'이다. 이 때문에 아리기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중심-반주변-주변 사이의 국부의 위계 구조를 재생산하는 중심의 '착취와 배제의 경향'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주변과 반주변의 입장에서 보면, 중심의 착취 경향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세계경제에서 '자율적' 지위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중심의 배제 경향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세계경제에서 '안전한' 지위를 확보해야 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호흐펠트는 세계체계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는 주변과 반주변의 '자율성' '안전성' 사이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교과서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주변과 반주변의 이러한 모순은 비교 우위를 인정하고 부등가 교환에 참여하는 수출지향적 공업화와 그것에 반대하는 수입대체적 공업화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수입대체적 공업화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의존하는 라틴 아메리카 형과 그것에 반대하는 소련 형으로 세분할 수 있지만, 양자 모두 실패하고 만다. 전자는 1970년대 이후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전향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 이것도 실패하고 만다. 후자의 '비자본주의적 발전' 1980년대 이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출지향적 공업화는 초민족적 법인자본보다는 외채에 의존하는 것으로, 동아시아 형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중심의 '탈공업화'로 인한 이른바 '신흥공업국 현상'은 이를 가리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남한과 대만이 주변에서 반주변으로 상향 이동한 사례이다. 그러나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신흥공업국에 뒤이어 1990년대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도 실추하고 만다.

 

아리기의 주변화 메커니즘을 민족자본의 위계 구조로 인한 '잉여가치의 이전'으로서 구조적 종속이라는 두셀의 개념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잉여가치의 이전'은 중심의 경우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 요인인 반면, 주변과 반주변의 경우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반작용 요인은 그 만큼 약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1980∼90년대 신흥공업국의 실추와 '주변의 경계'로의 하향 이동은 '잉여가치의 이전'으로서 구조적 종속의 결과인 것이다. 신흥공업국이 착취를 대가로 확보하려는 안전성이 종속의 결과로 상실될 위험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흥공업국으로서는 블랙 아프리카와 이슬람 같은 배제를 모면하기 위해서 불안정성을 감수하면서도 '금융 세계화'에 통합되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의 재개념화

이제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재개념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평균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 속에서 재벌과 비재벌 사이의 이윤율 격차가 심화된다는 것이 본래의 정식이었다. 이는 '잉여가치의 이전' 메커니즘으로서 '구조적 종속'이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 대한 재벌의 반작용을 약화시키고, 이에 따른 부담은 비재벌에게 전가된다는 관점을 경제법칙의 차원에서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10년 주기의 구조적 위기를 기준으로 시기 구분을 시도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금융 세계화'에 대한 인식과 결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외채 위기가 강제한 금융 개혁, 재벌 개혁을 계기로 재벌의 금융화가 가속화될 것인데, 단기적으로는 이른바 '빅딜'에 의한 과잉자본 처리가 재벌의 주된 목표겠지만, 장기적으로 재벌은 금융 그룹으로의 전화를 목표로 설정할 것이다. 나아가 초민족적 법인자본과 기관투자가의 후원 하에서 이른바 '소액주주운동'은 재벌이 '금융 세계화'에 하위 파트너로 통합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이른바 '재벌해체', '법인자본화'로서 재벌 개혁이란 '진보주의적' 지식인들이 곡학아세하는 공문구일 따름이다.

 

국제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멕시코-브라질과 남한의 금융 위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단기적-거시적 '안정화' 정책의 문제라면, 후자의 경우는 그것보다도 전자가 이미 1980년대에 해결한 장기적-미시적 '구조조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전자의 핵심은 재정 개혁이고, 후자의 핵심은 그것보다는 금융 개혁을 통한 재벌 개혁 및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한 노동 신축화라는 것이다. 국제경제연구소는 현재의 재벌 개혁은 6대 이하의 재벌 및 금융에 대한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5대 재벌을 포위·압박하는 수준에 불과하며, 개혁의 완성을 위해서는 다음 번 금융 위기를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1999 5월 하순에 방한한 캉드쉬의 '협박성 발언'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워싱턴 콘센서스'에 따라 위기의 시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데, 분명 2002년 대선을 전후한 언제일 것이다.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재벌은 금융 진출을 가속화하고, 동시에 '빅딜'을 통해 과잉 자본을 처리하면서 자동차, 전자설비, 정보·통신을 중심으로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재벌이나 재벌 노조나 일단 '상황의 지대'를 유지하는 것이 단기적 목표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공기업이나 공기업 노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제2의 금융 위기가 5대 재벌에게도 시장, 즉 금융의 원리를 적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 금융 그룹으로 전화한 재벌이 하위 파트너로 '금융 세계화'에 통합되는 것이 장기적 추세일 것 같다.

 

그렇지만 '부채-주식 전환'을 비롯한 이른바 '워크아웃'을 통해 형성된 '신흥시장'이 붕괴할 때 또다시 '자본 도피'가 불가피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본래 아메리카 헤게모니로서 '냉전 질서'는 세계체계를 양진영으로 분단하는 '얄타 체제'인데, 1990년대 이후 '포스트-냉전 질서'로서 경제통합으로의 경향이 출현하고 있다. 특히 1994년 멕시코 금융 위기 이후 아메리카는 경제통합 전략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국제경제연구소는 이 문제를 이른바 '달러화'(dollarization) 또는 좀 더 중립적인 용어를 쓰자면 '통화 대체'(currency substitution)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금융 위기의 귀결로서 '달러화'라는 브뤼노프의 예상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달러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러시아, 폴란드, 터키, 그리스, 필리핀 등에서 나타나는 현금 통화 및 예금에서 달러 비중이 높아지는 '사실상의 달러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의 금융 위기 이후 멕시코와 브라질이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정책적 달러화'로서 1991년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는 아르헨티나의 정책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정책적 달러화'는 두 단계로 진행된다. 중앙은행을 대체하는 이른바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의 페그제와 태환법을 통해 자율적인 화폐정책, 환율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첫 단계인데, 홍콩이 그 선례가 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 단계로 달러를 자국 통화로 채택함으로써 화폐 주권을 포기하고 화폐의 국가 관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 통합 없는 화폐 통합'이라는 점에서는 유럽 연합의 경우와 동일하지만, 유럽 연합과는 달리 공동의 통화가 아니라 달러에 의한 통합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요컨대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는 '재벌의 금융 그룹으로의 전화' '재벌의 금융 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테제, 나아가 '정책적 달러화' 테제 등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화된 테제를 계속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로 부르는 데 어떤 유효성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가 이미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한다면, 새로운 상황 속에서 그것에 어울리는 소멸도 필요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