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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리, 잊지 않으리 - 추기경 선종

thinks of 2009. 2. 20. 13:29
출처: http://blog.ohmynews.com/booking/255262

고 김수환 추기경

아이들은 언제나 곤혹스런 질문을 던지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끝없이 질문을 한다. 질문이 또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래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질문도 많다고들 하는데, 내 어렸을 적에는 호기심이 조금은 있었을지 몰라도 질문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은 듯하다.


먹고 살기 바쁘고 그리 쾌적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나 아닌 다른 가족들에게 뭔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동네 형들에게 많이 물어보았다. 동네 형들은 정말 많이 가르쳐줬다.

“짜식, 벌써부터 쬐그만 녀석이......”

요즘의 생활 조건들, 그러니까 틀에 박힌 아파트와 정형화된 놀이터와 모니터만 응시하게 되는 피시방이라는 둔탁한 조건들은, 하아 그 많던 동네형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싶은, 이런 조건들에서는 아이들이 집 바깥에서 누군가에게 삶의 비의에 대하여 질문을 하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안에서 끝없이 질문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답을 할 만한 게 있고 난처한 것도 있고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버마스는 “모든 질문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질문에는 답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읽어본 일이 없다.

고 김수환 추기경 (크리스천투데이)

며칠 동안 집안의 질문, 그러니까 아이들의 궁금증은 ‘선종’이나 ‘죽음’ 같은 것이었다. 선종이 죽음을 뜻하는 가톨릭의 용어인 것은, 뉴스를 들으면서 그대로 습득되는 것이지만, 그 어휘의 뜻이 궁금했던 것이다. 선종(善終)이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이젠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영면(永眠, 영원히 잠들다), 입적(入寂, 불교 승려가 사망했을 때 쓰는 말), 타계(他界, 역시 불가의 윤회 사상에서 나온 말로 다른 세계로 떠났다는 뜻), 소천(所天,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개신교의 용어), 별세(別世,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뜻),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졌다는 뜻으로 곧 친부의 죽음), 산화((散花/散華, 숭고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뜻) 같은 말도 신문의 짜투리 공간에 풀이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묻는다. 이것이야말로 대답하기가 곤란한, 아니 마땅한 답을 찾아낼 수가 없는 질문이다. 특별히 종교적인 입장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생물학적인 죽음, 죽음 이후의 상태, 죽음이 뜻하는 모든 것의 소멸에 대하여 집의 아이들에게 요령껏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책 한권을 골라봤다. 오늘 2월 20일은, 영화감독 로버트 알트만이 1925년에 태어났고 건축가 루이스 칸이 1901년에 태어났으며 한국 건축의 선구자인 김수근이 1931년에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엄수되는 날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집의 꼬마들이 ‘선종’이나 ‘장례’나 ‘죽음’이나, 그런 무지막지하고도 심오한 질문을 하게 될 경우, 함께 읽을 만한 책 한 권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들을 위하여 에바 에릭손의 책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례식> 표지

최근 출간된 울프 닐손과 에바 에릭손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례식>에는 꼬마 아이 세 명이 나온다. 에스테르, 말광량이 소녀다. 최근 미국의 어느 의대에서 ‘몸을 많이 쓰고 동작이 활발한 아이는 두뇌가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딱 그런 아이다. 한 순간도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하는 아이다.

그리고 ‘나’가 있다. 에스테르에 비해 내면적인 아이다. 글을 제법 쓸 줄 안다. 마지막으로 에스테르의 동생 푸테가 있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형이나 누나들 쫓아다니는 그런 동생이다.

에스테르와 ‘나’는, 지루하고 심심한 것을 참다 못하여 죽은 벌 한 마리를 찾아 장례를 치러주기로 한다. 에스테르는 무덤을 만들고 ‘나’는 벌을 위하여 시를 쓴다.

손 안의 어린 생명이
갑자기 사라졌네
땅 속 깊은 곳으로


자, 여기서부터 슬며시 책은 조금씩 무거워진다. 아, 물론 책 속의 아이들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그러나 계속 장난을 하는 중이다. 갑자기 펑펑 울거나 삶과 죽음의 비밀을 깨달았거나 하는 식으로 ‘오버’하지 않고, 계속 죽어버린 작은 동물을 찾아 나서고, 장례를 치러주고 또 찾아나서고,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놀이를 하러 뛰어간다. 그 사이사이에 ‘나’가 쓴 추도시가 있는데, 이 시만큼은 범상치 않은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누테라는 이름의 햄스터가 있다. 죽었다. 1천 일 동안 쳇바퀴를 돌다가 죽은 것이다. ‘나’는 햄스터 누테를 위하여 시를 바친다.

이제 추운 겨울이 다가온다네
사랑하는 누페, 정말 고마워
모든 게 고마워 랄라라라


수탉도 죽었다. 수탉을 위하여 ‘나’는 시를 바친다.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충분히 쓸 수 있는 시지만, 책 속의 맥락에서 잠시 벗어나 읽으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같은 시를 갑자기 생각하게 한다. ‘나’가 수탉을 위해 바친 시는 아래와 같다.

죽음은 네 시 십오 분에 갑자기 찾아왔다네
왜지? 왜 그랬을까? 내게 말해주게


아이들은 청어를 위하여 장례를 치러주고 추도시를 바친다. 그런데 청어는 냉장고 속에 있던 것이다. ‘장례 놀이’를 하기 위해서 냉장고 속의 청어를 꺼낸 것이다. 시는 이렇다.

여기 청어가 한 마리 있네
작은 청어가 접시에 있네
인생이란 늘 원하는 대로만 되는 건 아니라네


아이들은 불쌍하게 죽어버린 작은 동물을 찾아서 거리로 나선다. 거리, 그러니까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에는 죽어버린 작은 동물들이 심심찮게 있기 마련이다. ‘나’는 차에 치여 죽은 고슴도치를 위하여 시를 바친다.

땅에서는 납작하고 불편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둥글고 편안하겠지


에바 에릭손의 <유령이 된 할아버지> 표지

오늘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미사가 엄수되는 날이다. 명동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지난 며칠 동안 ‘김 스테파노 추기경을 위해 빌어주소서~’ 라는 추도문을 읊었다. 그것이 서구의 미사곡이 아니라 우리네 국악의 어떤 흐느낌과 비슷하다.

곡(哭)과 비슷하면서도 너무 처연하지 않게, 장엄하게 번지는 ‘연도’(煉禱)이다. 연도란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위령기도인데 전통의 창 음률로 부른다. 평화방송(PBC)에서는 이 ‘연도’가 계속 흘러나왔는데 CD를 재생한 게 아니라 신자들의 생생한 소리라고 한다.

이것을 포함하여 장례 절차의 큰 줄기가 서구의 가톨릭과 우리의 전통 양식이 아름답게 겹쳐졌다. 염습, 입관, 발인 등의 절차는 고유 장례의식으로 진행되었다. 22일에는 서울 명동성당과 용인 천주교공원묘원에서 추도미사가 엄수될 예정인데, 이는 삼우제(三虞祭) 역할을 하게 된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절차가 이렇게 진행된 것은, 현대 가톨릭의 대대적인 ‘혁명’과 다를 바 없었던 1962년의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직접 그 현장에서 체험하고 배운 생생한 가르침의 한 자락이다. 교황 요한 23세가 주도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서구 중심의 배타적인 세계관과 독선과 양식에 사로잡혀 있던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 굳게 닫혔던 문을 열고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세상과 소통하게 된 20세기의 중요한 사건 중의 사건이다.

참된 빛과 소금이었던 김수환 추기경 (권우성)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식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높은 담을 헐어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라고 강론하였다. 그 이후의 종교적인 실천과 사회적인 헌신은 이미 많이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한다.

그동안 명동 성당에서는 국악 미사를 자주 드려왔고 이번에 장례 절차도 고인을 유리관에 안치하여 추모객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한 정도를 빼놓고는 전통의 양식을 뼈대로 하였다. 이는 라틴어 미사 대신 자국의 언어로 미사를 드리게 한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연장이며 동시에 종교가 사회 속에서 고립된 거대한 섬이 아니라 이 시대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추기경의 유훈이기도 한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진지하면서 유쾌한 놀이를 다룬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례식>에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 지빠귀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그만 행로를 잃고 베란다 창문에 부딪혀 죽고 만 것이다. 아이들은 지빠귀를 위하여 장례식을 치러준다. ‘나’는 추도시 한 편을 쓴다. 비록 어린 아이의 말투이지만,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전에 바쳐도 좋을 시다. 시는 이렇다.

너의 노래는 끝났다네
삶이 가면 죽음이 오네
너의 몸은 차가워지고
사방은 어두워지네
어둠 속에서 넌 밝게 빛나리
고마워, 널 잊지 않으리

출처: http://blog.ohmynews.com/booking/255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