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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연패 KEPCO45, 공정배 감독은 죄가 없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19. 10:30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성적은 15승 65패(승률 .188)였다. 5위 롯데 자이언츠와도 16경기 차이가 났고, 한국시리즈 우승팀 OB 베어스에게는 16전 전패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전설적인 꼴찌의 아성을 무너뜨린 구단이 있었으니, 프로농구 1998-1999시즌의 대구 오리온스다. 오리온스는 정규리그 45경기에서 고작 3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 승률은 6.6%였다.

그러나 오리온스가 가지고 있던 ‘역대 최약체 프로구단’의 수모도 올해로 마지막이 될 듯 하다. 프로배구 2008-2009 시즌의 KEPCO45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초청팀’이었던 한국전력 시절부터 꼴찌를 도맡아 해오던 KEPCO45지만, 이번 시즌엔 상황이 좀 심각하다. 시즌 개막 후 25경기를 치렀지만, 아직 첫 승조차 신고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전무후무한 ‘전패 구단’이 탄생할 수도 있다.

다급해진 KEPCO45는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다. 사령탑을 맡고 있던 공정배 감독을 전격 경질시킨 것이다. KEPCO45는 감독 경질을 발표하자마자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 감독의 프로필을 삭제했다. 이럴 때만 빠르다.

무늬만 프로, 미미한 지원이 낳은 예고된 연패 행진


프로 스포츠에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시즌 중에 경질되는 감독은 흔히 볼 수 있다. 25경기를 치르면서 단 1승도 챙기지 못한 팀의 감독이라면 더더욱 할 말이 없다. 그러나 KEPCO45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한국배구연맹에 준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제5구단’으로 리그에 참가한 KEPCO45는 이름만 프로 구단이었을 뿐, 어려운 회사 사정과 공기업이라는 핑계만 앞세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다.

KEPCO45는 창단 과정에서 한국배구연맹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아, 드래프트 1차 1순위 지명권 외에는 제대로 된 ‘신생 구단 프리미엄’을 받지 못했다(그나마 1순위로 지명한 문성민마저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다).

이번 시즌엔 리그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우리캐피탈이 1차 2~5순위를 싹쓸이하고, 신생팀 보상선수라는 명목으로 상무에서 뛰고 있는 리베로 이강주까지 영입한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또한 KEPCO45는 프로 구단 중 유일하게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지 않았다. ‘아마추어 초청팀’ 시절부터 프로구단의 쟁쟁한 외국인 거포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KEPCO45는 프로구단이 되어서도 국내 선수들 만으로 경기를 치르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게다가 세터 김상기, 레프트 강성민, 센터 이상현, 남재원 등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주전 선수들이 대거 군복무를 하고 있고, ‘쌍포’ 양성만과 정평호도 잔부상을 안고 시즌을 치르고 있을 정도로 KEPCO45의 상황은 열악하다.

KEPCO45는 얇아진 선수층을 메우기 위해 2차 지명에서 6명의 신인 선수를 선발했지만, 이들이 다른 구단의 쟁쟁한 국가대표 선수들과 맞서기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11년 간 묵묵히 약체 팀을 이끈 대가가 경질?

자, 이렇듯 KEPCO45의 현재 전력은 프로 구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취약하다. 오히려 이기는 것이 신기한 일이고, 지는 것이 당연한 팀이다.

프로 구단을 선언하면서도 외국인 선수 선발, 드래프트 지명권 확보 등 기본적인 전력 보강조차 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이 투지를 잃었다고들 하지만, 애초부터 투지가 생길 만한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 구단의 책임이 더 크다. 

그럼에도 구단은 연패의 책임을 공정배 감독에게 돌렸다. 가장 간단하고 돈 안 드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KEPCO45의 전력이라면, 공정배 감독이 아니라 김호철 감독이나 신치용 감독 같은 소위 ‘명장’들이 와도 1승이 결코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공정배 감독은 1984년 한국전력에 입사해 선수 생활을 하고, 1998년부터는 한국전력의 사령탑을 맡아 11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쳐 왔다. 비록 ‘정상’에 서보진 못했지만, 고려증권의 소멸과 삼성화재의 독주, 그리고 프로화가 되는 배구계의 혼란기 속에서도 묵묵하게 한국전력을 이끌어 왔다. 

작은 키(179cm) 때문에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김상기를 영입해 ‘특급 세터’의 반열에 올려 놓았고, 연봉 상한제 때문에 삼성화재에서 방출된 정평호를 거포로 성장시키는 등 ‘마이너 선수’들을 키워 내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감독이다.

비록 올 시즌엔 이렇게 고전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KEPCO45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팀이다. 우선 ‘전력의 반’이라 할 수 있는 김상기 세터가 오는 4월에 전역하고, 문성민에 대한 지명권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뛰어난 외국인 선수와 드래프트 상위 지명을 받은 유망 신인 한 두 명 정도만 가세한다면 KEPCO45도 2~3년 안에 무시할 수 없는 복병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11년 동안 약체의 수모를 견뎌 오며 와신상담하던 공정배 감독은 프로 구단들과 제대로 경쟁을 펼쳐볼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팀을 떠나게 됐다.

비장한 심정으로 위태로운 ‘한국전력호’의 키를 쥐고 있던 공정배 선장은 이제 한국전력의 직원 신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 출처 : 양현석-김귀현의 <히트 앤드 런> http://blog.ohmynews.com/hitandrun/237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