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Daum 영화정보
Kirschblüten - Hanami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감독 도니스 되리
출연 엘마 베퍼, 하넬로레 엘스너, 아야 아리즈키, 나트야 울, 막시밀리안 브퀴크너 등
2008. 독일, 프랑스
@ 씨네코드 선재
남편의 암선고 소식을 의사로부터 듣게 된 트루디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와의 삶을 위해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선택한 여정은 자식들을 찾아가는 것, 그들에게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일'때문에 서로 소원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자식들에게
마지막에라도 애틋함을 갖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들의 냉랭함은 함께 살아왔고, 이제는 떨어져 있는 그런 시간만큼이나 깊었고
트루디와 루디는 둘만의 여정으로 발틱해를 찾아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트루디의 죽음으로 이제 둘은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루디는 트루디가 살았을 때 꼭 가보고자 했던 후지산을 찾아간다.
육체는 혼자 가지만 루디가 트루디를 추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트루디를 마음에 담은채...
그리고 루디 때문에 접어야만 했던 부토라는 일본무용을 도쿄에서 접하게 되고
무용수 '유'를 통해 트루디를 이해하게 되고, 뻣뻣하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부토 춤을 춘다.
추억할 게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영화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추억한다는 것은 안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며
행복한 기억의 향수에 젖는다는 건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의 표현이 될 것이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도 아마 살아온 여정에 대한 추억일 것이며
그를 돌아보는 발걸음은 살아낸 날들만큼이나 회한에 젖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런게 있는 것 자체가
사람을 사랑했고, 삶을 아꼈던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추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슬픈 영화여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그린, 행복이 담긴 영화가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라는 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부쩍 고민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다른 가족은 타인보다 더 먼 거리가 느껴진다.
루디와 트루디의 여정에 호의를 베풀어준 건 자식의 친구인 프랜지였고,
트루디의 1주기 추모식에 자식들이 한 명도 얼굴을 비추지 않을때 찾아와 준 것이 프랜지였다.
그리고 트루디를 잊지 못해, 그녀와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 함께 해준 것도 자식들이 아니라 소녀 부토 무용수 '유'였다.
'가족'이라는 틀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차지한다.
믿을게 별로 없어져가는 사회변화 속에서 더더욱 '가족'에 의지하게 되고, 가족에 신경을 쓰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틀이 자칫 구성원 개개인의 바램과 기대와는 달리 어긋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정폭력, 가정불화 같은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온갖 정성을 다한 부모의 입장에서는 냉랭한 혹은 무관심한 자식들에게 소외감을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뜻 때문에 자신의 앞날을 수정해야 하는 등의 서로에게 얽힌 끈이 발목을 잡기도 하며 실망을 주기도 한다.
또한 '가족애'라는 감정은 자칫 각자의 입맛에 맞는 이기심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진심'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빠진 의무감과 요구는 '가족'이라는 틀이 '안락의 공간'이 아닌 부담스러운 공간이 될 것이다.
'워낭소리'에서 할머니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면서 자식들에게는 안간다는 말을 했던 것도
스스로가 부담이 되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족이라는 관계보다 인간관계가 더 우선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피'를 나눴기 때문에 혈연적 유대관계가 생기는 정서야 자연스럽다고 할 지라도
같은 '피'를 나눴기 때문에 의무와 책임을 강요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개인의 혹은 한 가족이라는 집단의 문제로 치부되어서도 안되지 않을까 싶다.
이유는, 혈연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믿음과 신뢰가 파괴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특성이 더해져서 이런 문제가 심화되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믿을만한 '가족'을 중심으로 모든 애정과 정성이 쏟아질 수 밖에...
개인이 사회, 국가를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사회와 국가가 개인이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사이의 관계가 사무적인 관계에서 믿음과 신뢰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냥, 영화에서 루디가 죽은 후 루디와 트루디가 마지막에는 행복했을거라 믿고 말하는 사람이 가족들이 아닌
프랜지와 유 였다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그게 우리의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할 뿐 이다.
출처 : http://culturemon.tistory.com/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