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녀 1남를 키우던 주부가 49세에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98억원이었던 회사 연매출을 20년 만에 4200억원을 내는 중견기업으로 일궈냈다. 본사 직원만 1025명, 외주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5000명이 넘는다. 경주·화성·인천·군산에 공장이 있다. 중견기업 치고는 몸집이 꽤 큰 편이다. 그러나 김현숙(70) 회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쉬지 않고 배운 것이 전부였는데 내세울 게 뭐가 있느냐”는 게 이유였다. 막막했다. 인터뷰 내내 신화의 실체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가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처음부터 본인 의지는 아니었다. 경신공업은 남편 이기홍 사장이 현대건설 상무를 퇴임하고 1974년에 차린 회사다. 85년 남편이 작고한 뒤 망연자실해 있던 김 회장에게 당시 현대자동차의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남편의 친구)이 찾아왔다. 정 명예회장은 “남편이 어렵게 일군 회사인데 빨리 위기를 극복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채근했다. “당장 숭실대 최고 경영자 과정에 등록했죠. 배우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
당시 숭실대 어윤배 총장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열 마디 중 한마디만 알아들어도 됩니다. 천천히 하세요. ”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회사로 출근했다. 직원들과 같이 작업복을 입고 현장실습을 하며 일을 배웠다. 일을 마치고는 학교로 달려갔다. 숭실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서울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 서강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대학강의를 듣는 시간이 10년간 이어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오후 10시. 학교에서 배운 것과 그날 읽은 책 구절 중 중요한 부분을 메모하고, 기사를 스크랩하는 것에 매일 2시간 이상씩을 투자했다. 잠자는 시간은 다음날 오전 1, 2시가 됐다. 그렇게 모은 노트가 지금은 수백 권이다. 그의 집무실 책장과 집 서재엔 까만 대학노트가 빼곡하게 꽂혀 있다.
‘육아일기’가 ‘경영일기’로 변신.
김 회장이 메모를 하기 시작한 건 결혼 직후부터다. 아이들의 육아일기를 시작으로 남편과 결혼생활 얘기 등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 회사를 맡고 나서 그 일기장은 ‘경영 노트’로 변했다. 89년 현대자동차에서 배선 사업을 다원화할 때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 지도 메모로 남겨져 있다. “독점 공급하던 시장에 처음 경쟁자가 생겼던거죠. 정세영 명예회장이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그때 미안했었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현대의 결정에 대해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해외 수출 쪽으로 눈을 돌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계속 현대만 바라보고 국내 시장에만 안주했다면 지금의 성장도 없었을 거예요.”
‘독서’ 역시 그를 키워준 힘이 됐다. 김 회장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10년 후의 한국』(공병호) 같이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 있으면 임원들에게 당장 사서 단체로 읽고 독후감을 내라는 주문을 했다. 직원들이 똑똑해야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선우 현대금형 사장(한국여성경제인협회 인천지회장)으로부터 김 회장에 대한 기억의 한 토막을 끄집어 냈다.
“김 회장을 모시고 한인 상공인 교류차 캐나다를 간 적이 있었어요. 9시간이 넘는 비행 중 자세 한번 안 흐트러지시고 책을 보시며 무언가 끊임없이 적고 계시더라고요. 경영자 연수 때도 항상 맨 앞에 앉아 메모하며 강연을 들으세요. 진짜 모범생이시죠. ”(웃음) 김 회장은 회사에선 언제나 현장 직원들과 똑같이 작업복을 입는다. 인터뷰 당시도 작업복 차림이었다. 경영자 모임에서도 항상 무채색 정장의 수수한 차림이라는 것이 인천지역 여성 기업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인천지회 김태경 국장은 “스타킹을 기워 신고 다니시는 분이니 검소함에 대해선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몸에 밴 검소함도 현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성공사례를 읽고, 메모하며 배운 것이다.
그는 곧 20년 ‘경영 일기’를 정리해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끈기있게 생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지 그렇지 않은 지는 훗날 판명되며 역사의 차이는 곧 기록의 차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강준만 『이건희 시대』> 이건희 회장 말대로 김 회장의 메모는 경신공업의 ‘생 데이터’로 남는 셈이다.
그는 지방 공장 순시에도 비서 직원을 대동하지 않는다. 직원을 데리고 다니면 구석구석 숨겨진 일터 현장과 직원들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 회장은 직원들을 만나면 일일이 가족 근황을 물어보며 어머니 같은 섬세한 관심을 보인다. 외환위기 때 경신이 400명의 직원을 희망퇴직으로 극복한 저력 역시 ‘가족 경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경신공업 신화의 실체는 결국 ‘학구열’에 불타는 오너의 집념이었다. 올해 칠순을 맞은 김 회장. 그는 요즘도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새벽 출근을 한다.
[약력] 1936년생. 57년 수도여자사범대 국문학과 졸업. 85년 경신공업 대표이사(현). 92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AMP 과정 수료. 94년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 부회장. 99년 노동부 고용보험전문위원회 위원. 99년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이사(현). 2000년 인천경영자협회 부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