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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지위가 하이힐의 높이로 구분되던 시대가 있었다. 아찔한(?) ‘킬 힐’은 아무나 신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분이 높지 않은 여성은 높은 굽의 신을 신지 못했던 것. 신발의 높이만 봐도 신을 신은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고 ‘천한 것’들은 감히 높고 세련된 신을 신을 수도 없었다.
<하이힐은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모두 '적극적인'상태로 변화시킨다.사진은 프랑스 루이16세 시대 패션리더 마리 앙투와네트와 힐의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각선미 등. 사진출처:네이버카페 reinisia 등>
문화사가 에드아루트 푹스에 따르면 힐은 육체의 과시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발명품이었다. 힐을 신음으로써, 여성의 아름다움이 모두 적극적인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
하이힐은 16세기까진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17세기 초가 돼서야 서서히 세상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이힐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우선 에스파냐의 무어인 여성들이 신었던 목제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힐의 선구로 여겨진다. 이어 물림쇠로 채우도록 된 신의 굽은 이탈리아 유행했고 ‘나무신’이란 뜻의 단어인 ‘조콜리(zoccoli)'라고 불렸다고 한다. 당시 이 신은 너무나 인기가 좋아서 “베네치아의 남편들은 아내와 침대에서 반쯤밖에 즐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내들이 절반을 구두로 즐기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는 것. 아마도 오늘날 ’신상녀‘라고 불릴만한 여성들이 당시에도 많았던 듯 하다.
특히 높은 굽의 신발이 인기를 끈 것은 잘 알려진 데로 진흙과 쓰레기, 대변 (당시 유럽은 오늘날 인도처럼 거리에서 대소변을 보는 습관이 남아있었다.) 등으로 지저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이 같은 실용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에서 더욱 주목을 받고, 그것이 사용 이유가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위엄있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풍긴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거리에 진흙탕이 없을 때도 여자들은 하이힐을 계속 신어댔고, 하이힐이라는 게 치마밑에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인 만큼 (오늘날 키높이 구두처럼) 더욱 애용됐다.
힐의 모양도 투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으로 점차 변해갔고 여자들간의 ‘구분 짓기’에 따라 신분과 계층에 따라 힐의 모양도 세분됐다. 투박한 소시민이 신는 굽과 귀부인이 신는 신의 굽이 달랐고, 매춘부들이 신는 굽은 모양이 또 구분됐다. 특히 매춘부들은 결코 성큼성큼 걷는 법이 없이 언제나 높은 하이 힐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수도 빈에서 매춘부 수가 1만명에 달했고, 파리에선 2만-4만명, 1780년대 런던에선 5만명 정도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고 한다.)
프랑스 루이 15세 시기가 되면 굽의 높이는 6졸(어느 정도인지?)이 됐다고 하며 굽의 높이는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계속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활동했던 그 유명한 카사노바가 회상록에서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보니 귀부인들이 이방에서 저방으로 갈 때 (마치 캥거루처럼) 엉거주춤한 기묘한 자세로 뛰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하이힐 굽에 대한 개량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하이힐은 그 시대 여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최고의 수단이자 가장 두드러진 상징으로 변모했다. 그에 따라 루이 15세 시기 굽의 높이는 여자의 위치와 위상의 증거였고 그 척도가 됐다.
루이 14세 시대 이래 프랑스는 사치 풍조가 급속히 확산되던 사회였다. 각종 사치 풍조는 궁정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지방으로,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전해지고 있었고 이런 시기에 하이힐도 큰 위력을 보이며 퍼졌다.
생 시몽이 ‘회상록’에서 “사람의 품위가 식탁과 그밖의 사치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라고 개탄하던 시기에 걸맞게 각종 사치 풍조가 경쟁적으로 퍼졌고, 패션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유럽 주요국가에서 고급 창녀들이 사회적으로 ‘돌출’됨에 따라 조금씩 예상밖의 진로로 나가게 된다. 바로 신분이 높은 ‘품위 있는’ 여성들의 취향이 창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 이전에는 엄격하게 구분되던 힐의 모양도 한편에선 매춘부 것이라고 딱히 구분되기 힘든 형태로 변해 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한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유명한 창녀들은 어느새 패션의 모범이 되어 갔고, 궁정에 대항하는 경쟁상대로 등장하면서 큰 영향을 미쳐갔다. 상류사회 여인들도 남성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으려면 애첩, 창녀들과 일종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많은 부분 창녀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들의 ‘장점’을 수용했다. 저명 경제사가 베르너 좀바르트에 따르면 여성들이 고급창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장점이 ‘비로소 몸을 씻게 됐다’는 게 아이러니긴 하지만 말이다.
불황기를 맞아 ‘튀는 속옷이 잘팔린다’든지 ‘올해도 짧은 미니스커트가 인기’,‘올여름 아찔한 신발이 뜬다’ 등의 기사를 연일 쉽게 볼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오늘날의 풍속사를 어떻게 그릴지, 그리고 오늘날 신발이 가진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지 잠시 궁금해졌다.
<참고한 책>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3-색의 시대, 박종만 옮김, 까치 1994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7
출처 : http://v.daum.net/link/3325675/http://blog.hankyung.com/raj99/274219